Pong`s Life ★
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 본문
일시 : 2021.08.24
제목 : 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
저자 : 팀 켈러
책 속 문구 :
하나님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우리를 지으신 게 분명하다. 하나님은 춤 속으로 초대하기 위해서 우리를 지으신 게 분명하다.
우리에게 왜 유익한지 머리로 이해가 된 뒤에 순종하는 것은 춤이 아니라 정적인 태도다.
율법은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사랑의 삶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우리 자신에게 매몰되는 대신에, 하나님과 사람들을 어떻게 섬길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법을 공부하고 순종하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죄의 결과로부터 구속해 주신 분을 기쁘시게 하고 닮아 가기 위해서이다. 지키기 편하도록 인위적인 세부 사항을 덧붙이는 것은 율법의 정신을 깎아내리는 행위이다.
안식일의 주인이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제 우리는 종교로부터 영원히 쉴 수 있다.
우리가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아니기에, 하나님의 듯은 측정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다. 그분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최대치를 뛰어넘으신다. 하나님은 안전한가? "물론, 그분은 우리의 안전지대를 벗어난다. 그 누가 안전함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분은 선하시다. 그분은 우주의 왕이시다."
죄에는 언제나 형벌이 따른다. 누군가가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죄는 없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실 수 있는 길은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죄의 형벌을 받으시는 것이다.
여기서 마가는 "목숨"에 대해 일부러 '프시케(psyche)'라는 헬라어를 선택했다. 프시케는 심리학이란 단어의 어원이다. 이것은 남들과 구별되는 개인의 정체성이나 개성, 자아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개성을 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적인 것에서 정체성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들은 현재 세대가 다 가기 전에 예수님이 이 땅으로 돌아오신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세대가 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해서 이 말씀을 소중히 여겼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약하게(십자가 위에서) 시작되지만 약하게만 끝나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활의 힘을 경험하고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랑과 섬김, 영향력이 자라나는 현상을 목격했다.
답은 바로 '예배'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고 계신 일을 우리는 마음으로 똑똑히 봐야 한다. 하나님이 언젠가 우리에게 해 주실 포옹을 미리 맛보아야 한다. 머리로 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도 느껴야 한다.
교만의 가장 흔한 표현은 걱정이다. 보통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걱정을 한다. 하지만 끊임없는 걱정은 어디서 오는지 아는가? 바로 교만에서 온다. "내 삶은 이러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지 않을까?"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할 때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진정한 겸손은 걱정이 아니라 영혼에 안식을 준다.
성전의 이야기는 에덴동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최초의 동산은 하나님이 임하신 성소였다. 하나님의 임재만 있고 죽음, 기형, 악, 불완전은 없는 낙원이었다. 하나님이 계시면 절대적인 번영과 만족, 기쁨, 행복의 상태인 '샬롬'이 임한다. 하지만 최초의 인류는 하나님 외의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 탓에 낙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담과 하와가 성소에서 쫓겨나면서 뒤를 돌아보자 "두루 도는 불 칼"(창3:24)이 보였다. 그 후로 누구도 이 불 칼을 지나 하나님의 곁으로 갈 수 없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결과는 참혹했다. 하나님 외에 권력, 지위, 찬사, 가족, 민족, 국가 같은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니 갈등, 전쟁, 폭력, 가난, 질병, 죽음이 몰려왔다.
느낀 점 :
팀 켈러에게서 듣는 마가 복음 강해집이다. 마가 복음의 처음부터 끝까지 해석을 들을 수 있다. 팀 켈러 고유의 쉽고도 명확한, 그러면서도 감정적인 부분을 건드는 말투가 인상적이다.
더불어 늘 드러나는 나의 부족한 점을 보며, 나의 부족한 점을 보면서도 또 죄를 짓고 앉아 있는 나를 보니 참 마음이 어렵다.
몇 가지 이 책에서 새롭게 느낀 점들에 대해서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우리를 지으신 게 분명하다. 하나님은 춤 속으로 초대하기 위해서 우리를 지으신 게 분명하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기쁨의 춤을 추는 관계로 표현한 것이 와닿았다. 이 기쁨의 춤을 함께 추기 위해서는 우리가 부족해서는 안되며, 우리가 머리로 움직여서도 안된다. 춤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즉각 반응하며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온 몸과 마믐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우리는 주님과 하나되는 경험과 함께 이 기쁨의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개성을 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적인 것에서 정체성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가족을 떠나고, 재산을 모두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에 대해 문자 그대로에만 집착하거나 이 부분만 외면한다든가 다양한 사람듬의 반응이 있다. 나는 후자인 것 같다. 세상적인 것에서 정체성을 얻으려하지 말고 오직 나를 따르라. 이 말이 참 어렵다.
마치 자전거 타는 거랑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앞을 봐야 안넘어지고 잘 탈 수 있는데 자꾸 불안하니 앞을 보지 않고 타이어나 핸들 등 자전거를 바라보고 있으면 넘어지게 되어 있다. 우리 삶도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교만의 가장 흔한 표현은 걱정이다. 보통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걱정을 한다. 하지만 끊임없는 걱정은 어디서 오는지 아는가? 바로 교만에서 온다. "내 삶은 이러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지 않을까?"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할 때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진정한 겸손은 걱정이 아니라 영혼에 안식을 준다."
이 말은 사실 새롭다기보다 쓸데 없는 세상 근심 걱정 많은 내게 와이프가 자주해주는 말이다. 근심 걱정 또한 교만이라고 말이다. 신앙 관련 서적을 열심히 드려다보며 하나님을 더 알아서 불안을 잠재우려는 나와 달리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늘 항변하는 나의 말은 그래도 넘어지면 아파요라는 말 뿐이다. 하나님보다 나에 대해,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안다는 생각 자체가 교만일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 내일의 필요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오늘을 날리고 있는 나는 참 스스로 안타깝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을 기쁨으로 누리라고 주셨을 것 같다. 아직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찾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죽고 나서 그 때에 모두가 부활하여 그분의 곁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지금은 고통만 느끼며 버려도, 잊어도 되는 시간이라고 이 삶을 우리에게 주셨을 것 같지 않다.
이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기쁨의 춤을 추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하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머리로만 주님을 알고 이해하려고 하는 상태에서 가슴으로 주님을 진정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
그것조차 내 의지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으니 그저 간구하는 수 밖에 없지만 말이다.
삶에 적용할 점 :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