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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ng`s Life ★

오직 예수 본문

Books

오직 예수

퐁~★ 2020. 8. 16. 14:17

일시 : 2020.08.14

제목 : 오직 예수

저자 : 라비 제커라이어스

책 속 문구 :


당신은 목수의 아들 아닌가요?

신의 부름을 받은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신이다

 

이 사람이 동정녀에게 태어났고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이 질문이 특별히 중요한 것은 이런 내용이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백 가지 예언들이 있는데 그 예언과 성취를 완벽하게 맞출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적대자들이라면 그분이 메시아라는 주장이 학자들의 조사와 성경의 검증을 감당해 낼 수 있는가를 한 세대 한 세대 확인해 보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첫 제자들에게는 집안 가구보다 족보가 훨씬 중요했다.

 

히브리인들의 생각이나 그 일가족의 주장이 아닐지라도, 지난 수세기 동안 기독교 복음을 가장 적대시해 왔던 한 종교에서 이 동정녀 탄생에 대한 가장 놀라운 확언을 해 주고 있다. 바로 이슬람교다. 예수님 이후 600년경에 기록된 코란조차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확언하였다(코란의 수라 19:19~21을 보라).

 

예수님이 당신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를 증명해 내신 두 번째 방법이 있다. 그분의 삶은 지상에 존재했던 삶 중에 가장 순전한 것으로 항상 인식되어 왔다. 여러 경우에 그의 적대자들은 반대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들을 내세우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본래 삶을 절대 욕되게 할 수 없었다. 주님은 대적자들에게 당신 발 앞에 무슨 죄목이든 내보라고 도전하셨다. 이 책을 통해서도 그들이 여전히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반면에 다른 어떤 개인도 그런 찬사를 받아내지 못했다. 여기에는 무함마드, 붓다, 크리슈나도 포함된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인정하는 바다. 그들의 삶과 분투가 그들 자신의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증거가 없어서 못 믿겠어요

최고의 증거인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다

 

 실제로 매번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직후에 이런 도전이 왔다. 그렇다면 그들은 기적을 보고도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뭔가 그 이상을 원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표적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내면의 동기 자체가 진정성 있게 진리를 구하는 게 아님을 지적하신다. 또한 그들이 종교적임도 불구하고 강퍅한 이방인보다 더 심각하게 진리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을 고발하신다. 다시 말해, 그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표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적들 뒤에 흐르는 메시지였다.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것보다 더 위대한 증명이 무엇이겠는가?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과 육체적인 부활 시기를 정확하게 예언함으로 그분의 권세에 대한 가장 놀라운 증거를 제시하셨다.

 


종교는 취향 아닌가요?

구원은 생명의 문제다

 

"인생을 사는 사람들 중에 모든 순간을 실감하는 사람이 있나요?"

인생을 살면서 모든 순간을 실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인생이 음식만의 문제가 아니라 말과 음식으로 채울 수 없는 더 큰 굶주림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또한 살기 위해 먹는 것도 아니다. 인생은 그 자체로 살아갈 가치가 있다. 인생은 그저 소비하는 존재로 살아간다고 만족되지 않는다. 육체적인 배고픔과 영적인 배고픔을 서로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지지해 주는 상호관계 속에서, 만족스럽게 채워질 때 비로소 인생은 진정으로 채움을 받을 수 있다. 신뢰성과 연속성이야말로 참되고 영원한 것의 열매다. 날마다 빵을 추구하느라 자신의 꿈과 행동을 빵이 지배하도록 살아가는 수백 만명의 사람들에게 인생은 그저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것일 뿐이다. 그들의 채워지지 않은 내면은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점은 주님께서 자신의 진짜 살점과 피를 문자적으로 먹으라고 하신 말씀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이 실제로 살점을 나눠 주신 게 아니라 떡 조각을 나눠 주셨기 때문이다.

둘째, 만약 정말 실제 살과 피를 의미하셨더라면, 주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한정적이다. 한 사람의 육체를 아무리 조각내도 무한한 개수를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셋째, 시간적으로도 제약이 있다. 실제로 몸은 금세 부패하고 죽은 뒤에는 그 생명력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육체적 죽음의 현장에 있던 사람만 그 식사에 참여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넷째, 주님은 이미 죽으신 후 다시 그 몸을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살과 피를 진짜로 먹는다면 어떻게 그 몸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는가.

다섯째, 주님은 교회로 하여금 그 순간을 기억하여 주님이 행하신 식사를 전 역사에 걸쳐 반복하라고 명령하셨다. 만약 주님이 자신의 실제 몸을 의미하신 것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여섯째, 주님이 이르신 말이 영이지 육체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요6:63).

마지막으로, 주님은 예고하신 대로 실제로 희생하시는 순간에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셨다.

 

떼어 낸 빵 조각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변한다. 주님은 이제 곧 육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완전히 부서지셔서 친구도 대적도 놀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육체의 깨어짐으로 회복이 일어날 것이다.

 


이 고난은 내 죄 때문인가요?

고난도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있다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던진 질문은 이렇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이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9:2).

그가 자신의 고난에 책임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원인인가?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만다. 그가 맹인인 것은 그 젊은이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에 빛이로라"(요9:3~5)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것을 종합한다면 일관되고도 독특한 설명에 이르는 여섯 가닥의 요소들이 나온다. 성경은 질문 자체를 부정하거나 답변의 이면적 의미들을 제시해서 도망가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선의 시작이시다

악의 신비를 풀어 줄 대본은 하나님께 있다

선과 악, 그 너머의 핵심은 거룩함과 사랑

악의 면전에서 선함은 강력하다

악은 외적 실재가 아니라 우리 내적 실재

악의 정점에서 영적인 눈을 뜨다

 


죽음 앞에서 왜 침묵하셨어요?

이미 진리가 충분하고 명확하다

 

편견과 증오의 소음 한가운데 드러나는 진리의 침묵이다.

 

비난을 이겨내는 침묵의 힘

첫재, 조직적인 악에 맞서는 선의 침묵이 있다. (중략)

둘째, 인식의 침묵이다. (중략)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침묵이 완성된 사명의 침묵이었음을 또한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도달한 이 모든 의미들을 생각해 볼 때, 과연 예수님의 침묵은 스스로 신적 지위나 예언자적 지위를 주장한 다른 존재들과 대조를 이루는가?

그렇다. 그것도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은 개인과 사회에 중대한 세 가지 차이점을 일으키는 메시지와 방법을 갖고 오셨다. 그것은 회심, 강요, 계시다.

기독교 신앙이 왜 독특한가?

첫째는 회심의 문제다. 예수님의 메시지가 계시하시는 바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로마인이든 어느 다른 문화권이든 각 개인은 태어나면서 저절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다스리시도록 하는 의식적인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중략)

회심이 개인적인 것이고 출생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이 주제는 그 다음 주제인 강요에 이르게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그 누구도 크리스천이 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과 이슬람교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지점이다. (중략)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개개인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그가 강요나 배후 조종 때문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반응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문제로 넘어간다. 이 모든 논의의 핵심에 한 가지 문제가 놓여 있다. 예수님의 침묵이 정말 예수님이 아무 말씀을 안 하셨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이미 말씀하셨다. 그래서 최종적인 권위의 기반이 다른 신앙 체계들과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모어 경은 그들에게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생명이므로 그 사람만큼 올곧아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어마어마한 진리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발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말씀에 헌신되어 있으셨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말씀과 삶이 일치하는 삶을 사셨다. 그 누구의 삶에도 이런 평가는 불가능하다.

 


이 땅의 정원사가 당신인가요?

우리가 만든 신을 믿겠는가 우리를 만드신 신을 믿겠는가

 

그러나 주님이 누구신지 확실하게 알려면 도대체 얼마나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셔야 하는가?

 

관계의 본질은 반복되는 시각과 개입의 문제가 아니라 꾸준한 신뢰와 만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목표는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슴하셨는가의 여부를 확인하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어떻게 계시하셨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창세기 본문에 대한 네 가지 주요 생각들이 과다한 비본질적인 논쟁 속에서 유실되어 버렸다. 창세기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주된 제안점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라는 점과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영원하신 분이라는 점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소통하시는 하나님이다. 두 번째 제안점은 세계가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 인간은 지적이고 영적인 존재다. 세 번째 제안점은 삶은 혼자서 살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 관계를 통해 살아 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인간은 관계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다. 네 번재 제안점은 인간은 자기주도적 결정권을 가진 도덕적 개체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렇다. 인간은 책임 있는 이성적 존재다.

여기에서 세 가지 의미 있는 관계가 수반된다. 첫 째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다. 예배의 거룩성을 의미한다. 둘째는 배우자 및 인간 동료들을 향한 인간 사이의 관계다. 관계의 거룩성을 의미한다. 셋째는 피조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다. 청지기 역할의 거룩성을 의미한다. 첫 번째 관계로부터 다른 두 가지 관계들이 나온다.

 

느낀 점 :

한국어 제목인 오직 예수와 영어 제목인 Jesus Among Other Gods는 조금 의미가 다른 것 같다. 결론적으로 오직 예수님만이 진짜 신이시다라는 의미로 제목을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라고 유추해 본다. 그러나 이런 제목에 이 책의 고유 특성이자 내가 볼때 장점 중의 하나인 타 종교와의 비교라는 점이 가리워진 느낌이다. 타 종교와의 비교해서 기독교가 진리인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토종 한국인으로 한국에서만 교육을 받은 나는 불교에 대해서는 원치 않아도 시험을 위해 어느 정도 배웠었다. 그러나 힌두교나 이슬람에 대해서는 개인의 별다른 관심이 없다면 제대로 배울 일이 없었다. 내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나 밥 먹기 위한 기술 공부 시간 외에는 인생을 즐기고자 했지 굳이 힌두교나 이슬람에 대해 공부까지 해야하나 싶었다. 가끔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같은 믿음 아니냐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을 위해 배우기에는 솔직히 귀찮았다. 내 주변에 친구 중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지도 않았고 대부분 그저 교회 다닌다면 그것을 비난하고자 질문을 던지는 이들 밖에 없는 데 진실되게 응대해봐야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연유로 나는 타 종교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고 살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타 종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또 다시 정말 예수님만이 신이시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현재까지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믿는 종교는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있을 것이다.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라기보다는 붓다의 수행 방법을 따라 수련하는 방법이다. 학교에서 배울 때는 생각 없다가 이번에 새로 깨달은 것은 이들이 말하는 인과율의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라는 점이다. 생각없이 수능을 위해 공부해서 그런지 새로웠다. 힌두교와 이슬람교는 신을 믿으나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믿는 다는 것이 예수님이라는 신을 믿는 기독교와 다르다. 예언자들은 신이 아니기에 죄를 짓고 또 자기 오류도 범하는 존재들이다. 또한 힌두교의 자기 안에 다양한 신을 발견해 내는 믿음 속에서 도덕법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라는 질문 등에 의해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존재하며, 이슬람교 또한 절대시 되는 경전 안의 오류나 수정될 수 있는 경전이라는 등 다양한 점들이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연 신이신가? 자칭 신이라고 하는 사람은 셋 중 하나다. 미쳤거나 거짓말이거나 진짜거나. 미쳤거나 거짓말이라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하던 자들이 그분의 죄를 찾지 못했을까? 그분을 3년 간 바로 옆에서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던 수많은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그분을 따랐을까? 등의 질문이 따른다. 예수님 사후 교묘하게 제작된 것이다라는 이야기에 대한 정말 많은 음모론 전부에 타당한 반론이 다 있다. [기독교의 기본 진리] by 존 스토트 등의 책을 보면 도움이 된다. 
다양한 의문이 있고 거기에 대한 증거가 있다. 기독교는 논박을 회피하지 않고 반가워하며 검증된 신앙이다. 개인적으로는 그저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닌 이리저리 따져보고 재보라고 허락해주신 것이 정말 감사하다. 그렇게 의심했던 사람조차 품어주실 것임을 알기에.

다만 성경 문서의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연도 측정을 해봤을까라는 의문을 품었던 나조차도 굴복한 생각은 정말 많은 증거를 갖다된다고 해서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이 믿어질 수 있는가다. 누군가가 분명 죽었던 사람이 육신으로 다시 나타났다고 하는데 믿으려면 어떤 증거가 필요할까?
성경 안에 많은 증거가 있고, 코란에도 성경을 증언해 주는 것이 있고, 역사서에도 성경을 증언해 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진리를 위해 목숨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증거와 증명이 있다고 한들 믿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솔직히 고구려라는 나라가 실제 존재했음을 믿을 수 있겠는가? 많은 땅 속에 물품들이나 광개토대왕비 같은 것들이 조작되었다는 생각은 안해봤는가? 실제로 우리 나라의 역사는 일본의 수정 하에 많이 변질된 부분들이 있다. 대백제설 등을 찾아보면 알 수 있다. 역사는 승자들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다. 아무리 증거가 많다고 해도 이런 의심만을 품으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없게 된다. 
여기에 더하면 우리의 시각과 청각은 뇌에서 재조합되는 것이다. 당신이 보고 듣는 것도 실제는 아닐 수 있다.
책 속에 작가가 말하듯이 증거가 부족해서 예수님이 신이시자 인간으로 우리에게 오셨음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모든 증거에 최대한 객관적인 마음으로 편견 없이 대하고자 하는 자세와 진리임이 확인되면 주저함 없이 믿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시작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굳은 믿음을 얻게 될 줄 믿는다.

 

삶에 적용할 점 :

나는 감사하게도 먼저 경험 증거를 얻고,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아직 부족한 것은 많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더 믿음이 확신 되어지는 단계로 나아가길 소망한다.

나는 내 삶을 되돌아 보니 그 많은 기적으로 도우심에도 불구하고, 불쌍하게도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심은 알겠는데 나를 사랑하심은 확신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