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ng`s Life ★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 본문
일시 : 2019.04.07
제목 :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
저자 : 에릭 캔델
책 속 문구 :
화가가 인문학적인 측면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나는 뇌과학도 인간 존재의 가장 심오한 문제들에 답하려고 애쓴다는 점을 학습과 기억의 연구를 사례로 들어 보여주고자 한다. 기억은 우리의 세계 이해와 정체성 자각의 토대가 된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이 배우는 것과 기억하는 것에 힘입이서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세포와 분자 수준에서 기억의 토대를 이해한다면, 자아의 본성을 이해하는 쪽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게다가 학습과 기억을 연구하는 이들은 우리가 학습을 하고, 배운 것을 기억하고, 세상과 상호작용을 할 때 그 기억(자신의 경험)을 활용하는 고도로 특수한 과정들이 뇌에서 진화해왔음을 밝혀냈다. 그런데 그 과정들은 우리가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내 핵심 전제는 비록 과학자와 화가의 환원주의적 접근법이 목적 측면에서 동일하지는 않지만(과학자는 복잡한 문제를 풀기 위해 환원주의를 사용하고, 화가는 감상자에게서 새로운 지각적,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환원주의를 사용한다),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앙리 마티스가 다음과 같이 간파했듯이 말이다.
"생각과 형성을 단순화함으로써 우리는 흡족한 마음의 평화를 향해 더 다가간다. 기쁨을 표현할 방법을 찾기 위해 생각을 단순화하는 것, 우리가 하는 일은 오로지 그것뿐이다."
로젠버그(1906~1978)는 1952년 <아트뉴스>에 <미국의 액션페인터>라는 글을 발표해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미국의 미술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화가들이 더 이상 미술의 기법 문제로 고민하지 않고, 화폭을 "행위가 이루어지는 무대"로 삼는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썼다. "화폭에서 이루어진 것은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었다." 로젠버그에 따르면, 예술작품의 형식적 특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창작 행위였다.
리글(1858~1905)은 명백하지만 지금까지 무시되어왔던 미술의 한 심리적 측면을 강조했다. 바로 미술이 보는 이의 지각적, 정서적 참여 없이는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화폭에 담긴 2차원 구상 이미지를 시각 세계의 3차원 묫로 전환하면서 화가와 협력한다. 그뿐 아니라 화폭에서 보는 것을 개인적인 관점에서 해석해 그림에 의미를 추가한다. 리글은 이 현상을 "감상자의 참여"라고 했다. 리글의 연구로부터 이끌어낸 개념과 인지심리학, 시지각의 생물학, 정신분석 등에서 나오기 시작한 통찰들을 토대로, 크리스와 곰브리치는 이 개념을 더욱 발전시켰다. 곰브리치는 그것을 "감상자의 몫"이라고 했다.
4장에서 설명하겠지만, 망막에 비치는 이미지는 먼저 선과 윤곽을 기술하는 전기 신호로 해체되어서 얼굴이나 대상의 윤곽을 만들어낸다. 이 신호들은 뇌로 전달되어 재편되고, 조직화에 관여하는 게슈탈트 규칙(뇌는 먼저 지각 대상을 세부적으로 파악한 뒤에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 배경, 유사성, 연속성 등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전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게슈탈트 원리라고 한다 -옮긴이)과 사전 경험을 토대로 재구성되고 정교해진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각하는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놀랍게도 우리 각자는 남들에게 보이는 이미지와 놀라울 만치 비슷한, 풍부하면서도 의미 있는 바깥 세계의 심상을 창조할 수 있다. 이 시각 세계의 내면 표상을 재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뇌의 창작 과정이 작동하는 것을 본다.
지각이란, 뇌가 외부 세계로부터 받는 정보를 이전의 경험과 가설 검증을 통해 배운 지식과 통합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 지식(반드시 뇌의 발달 프로그램에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을 우리가 보는 모든 이미지에 갖다 붙인다. 따라서 추상미술 작품을 볼 때, 우리는 작품을 물리적 세계에서 평생에 걸쳐 경험한 것들과 연관짓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고 알게 된 사람들, 우리가 살아온 환경뿐 아니라, 지금까지 마주쳤던 다른 모든 미술 작품에 대한 기억과도 연결한다.
또 우리가 미술에 반응하는 양상의 차이도 그것으로 설명된다. 앞서 살펴봤듯이 미술 작품을 접할 때의 우리 반응은 선천적인 상향 지각 과정뿐 아니라 하향 연상과 학습에도 의존하며, 후자는 시냅스의 강도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추상미술은 이미지를 형태, 선, 색, 빛으로 환원하고, 따라서 하향 처리에 더 심하게 의존한다. 다시 말해 감정, 상상, 창의성에 더 의존한다.
칸딘스키가 추상을 받아들였음에도 그의 그림이 지닌 마법이나 감상자의 참여도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사실 <구성을 위한 스케치V>의 추상 요소들은 <교회가 있는 무르나우1>의 구상 요소들보다 보는 이의 눈과 마음에 더 큰 도전 과제를 안겨주며, 감상자의 상상력을 더 많이 요구한다.
추상 개념의 선구자인 칸딘스키는 색, 기호, 상징으로 추상적 형태를 표현한 최초의 화가였다. 그는 감상자가 기호, 상징, 색깔을 기억해서 떠올린 이미지, 생각, 사건, 감정과 연관지을 것임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터너는 회화를 "모방이라는 지루한 잡일"로부터 해방시킨 최초의 화가 중 한 명이었다. 게다가 그는 상대성 이론이 발표되기 한참 전에 그 일을 해냈다. 터너는 새로운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 이 자율성을 획득했다. 더 투명한 기름을 쓰고, 거의 순수한 빛을 떠올리게 하는 반짝거리는 효과의 색을 썼다. 이 두 기법을 잘 활용함으로써 그는 추상을 향해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중요한 점은, 회화에서 구상 요소릊 제거해도 감상자의 마음에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터너의 작품이 보여준다는 것이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사실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야말로 추상미술이 지닌 힘의 일부다.
처음에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하버드대학교로 옮긴 데이비드 허블과 토르스텐 비셀은 뇌 1차 시각 피질의 각 신경세포가 특정한 방향(수직, 수평, 빗금 등)으로 놓인 단순한 선과 모서리에 반응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선들은 형상과 윤곽의 구성단위다. 궁극적으로 뇌의 고등한 영역들은 이 모서리와 각을 기하학적 모양으로 조립하며, 그것이 바로 뇌에서 표상되는 심상이 된다.
미술 작품의 질감에 대한 감상자의 반응을 평가할 때, 미술사학자들이 종종 과소평가해온 것이 있다. 바로 서로 다른 감각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종합하는 뇌의 능력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시각과 촉각은 유달리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버나드 베런슨은 아마 이를 강조한 최초의 미술사학자였을 것이다. 그는 "회화의 본질이 (...) 촉각적 각치에 관한 의식을 자극하는 것"이며, 따라서 묘사되는 실제 3차원 대상만큼이나 강렬하게 질감과 모서리를 통해 촉각적 상상에 호소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는 형태의 환원된 요소(부피, 두께, 질감)가 미적 즐거움의 주된 요소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베런슨이 말하는 것은 음영이나 원근처럼, 착시를 통해 촉각 감수성을 일으키는 것들이었다. 반면에 데 쿠닝이나 수틴의 작품을 볼 때는 시각적 감각이 그림 자체의 3차원 표면을 통해 촉감, 압력, 쥘휨 등의 감각으로 변형된다. 이렇듯 시각 요소의 추상화는 촉각적 호소력과 결부되어, 우리의 미적 반응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언뜻 보면 폴록의 극도로 복잡한 액션페인팅에서 환원적 요소를 식별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사실 두 가지 중요한 환원주의적 발전을 이루었다. 첫째, 전통적 구도를 버렸다. 그의 작품에는 강조하는 부분도, 알아볼 수 있는 부분도 전혀 없다. 중심 모티프도 없고 우리의 주변시를 부추긴다. 그 결과 우리 눈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우리 시선은 캔버스의 어느 한곳에 머무르거나 초점을 맞출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액션페인팅에서 생명력과 역동성을 지각하는 이유다. 둘째, 폴록의 액션페인팅은 그린버그가 이젤 회화의 "위기"라고 한 것을 도입했다. "이젤 회화, 벽에 거는 옮길 수 있는 그림은 서양의 독특한 산물이며, 다른 지역에는 그에 해당하는 것이 전혀 없다. (...) 이젤 그림은 극적인 효과를 일으키기 위한 장식물이 되어 있다. 벽에 난 상자 같은 구멍으로 그 뒤의 광경이 비치는 착시를 일으키며, 그 공간 안에서 통일성을 갖추기 위해 3차원인 양 짜여 있다."
폴록 자신은 드립페인팅을 미술을 향한 환원주의 접근법이라고 여겼다. 그는 구상을 버림으로써 자신의 무의식과 창작 과정에 있던 제약들을 제거한 양 느꼈다. 여러 해 전에 프로이트가 지적했다시피, 무의식의 언어는 "1차 과정" 사고에 지배된다. 그것은 시간이나 공간 감각이 전혀 없고 모순과 불합리한 것을 쉽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의식적 마음의 2차 과정 사고와 다르다. 폴록은 의식적 형상을 무의식적으로 동기 부여가 된 뿌리기 기법으로 환원시켜, 놀라운 창의성과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폴록은 시각적 뇌가 패턴 인식 장치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뇌는 자신이 받는 입력으로부터 의미 있는 패턴을 추출하는 전문가다. 입력이 극도로 혼란스러울 때도 그렇다. 이 심리적 현상을 파레이돌리아라고 한다. 모호한 무작위 자극을 의미 있는 것으로 지각하는 현상이다.
그들은 우리가 확률이 낮은 무작위에 가까운 선택에 직면할 때, 하향 인지 과정들이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그 선택에 질서를 부과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마 몬드리안도 특정한 각도를 배제하고 다른 각도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생략된 것에 대한 감상자의 호기심과 상상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은연중에 깨달았을 것이다.
록펠러대학교의 찰스 길버트가 지적했듯이, 몬드리안의 선형 그림은 중간 수준의 시각 처리를 불러낼 가능성이 높다. 즉, 1차 시각 피질에서 일어나는 처리 말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중간 수준의 처리에서는 어느 표면과 경계가 대상에 속하고 배경에 속하는지를 결정함으로써 대상의 모양을 분석한다. 통일된 시야를 생성하는 첫 단계다. 또한 몬드리안의 그림은 하향 처리의 대상이기도 하다. 하향 처리를 통해 다른 미술 작품과 화가들을 해당 작품과 관련짓는다.
나중에 서양미술에서도 에로티시즘과 공격성을 융합한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혹적이면서 아름다운 <유디트>가 대표적이다. (중략) 클림트는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에로티시즘부터 공격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적 감정을 경험하며, 그런 감정들이 때로 융합된다는 것을 자신의 작품들 전반에 걸쳐서 보여준다.
3장에서 살펴봤듯이, 편도체는 감정을 조율하며 시상하부와 의사소통을 한다. 시상하부에는 육아, 수유, 짝짓기, 공포, 싸움과 같은 본능적 행동을 관장하는 신경세포들이 들어 있다. 앤더슨은 시상하부에서 두 가지의 독특한 신경세포 집단이 들어 있는 핵, 즉 신경 세포 덩어리를 발견했다. 한쪽 집단은 공격성을 조절하고, 다른 쪽 집단은 성교를 담당한다. 이 두 집단의 경계에 놓인 신경세포 약 20퍼센트는 성교를 하거나 공격 행동을 할 때 활성을 띨 수 있다. 이는 이 두 행동을 조절하는 뇌 회로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는 어떨까. 몇몇 원천에서 나온 정보들이 감상자에게 유입되는 빛의 패턴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지각 경험을 낳는다. 상향 처리를 통해 뇌에 많은 정보가 전달되지만, 이전에 시각 세계를 접한 기억으로부터도 중요한 정보가 추가된다. 다른 미술 작품들과 경험들을 담고 있는 이 기억을 통해서 우리는 망막에 맺힌 이미지의 원인, 범주, 의미, 효용, 가치를 추론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망막 이미지의 모호함을 대체로 정확히 해소할 수 있는 이유는 뇌가 맥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맥락'은 대강 말하자면, 서로 다른 정보 조각들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망막 이미지에 들어 있는 정보, 얼굴 처리처럼 뇌의 계산 기구에 내재된 정보, 마지막으로 미술 세계를 포함해 이전에 세계를 경험하면서 배운 정보 같은 것들이다.
따라서 추상미술가들이 주장하는 것, 그리고 추상미술 자체가 증명하는 것은 인상, 즉 망막의 감각적 자극이 그저 연상적 회상을 촉발하는 불꽃이라는 것이다. 추상화가는 회화적 세부 사항을 제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가 자신의 독특한 경험을 토대로 그림을 완성할 수 있도록 '조건'을 창조한다.
많은 감상자가 추상미술에서 이끌어내는 즐거움은 제임스가 익숙한 것과의 연상을 통한 "새로운 것의 성공적인 동화"라고 부른 것의 한 예다.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에도 일관성 있는 지각 경험을 이끌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더 나아가 새로운 것의 동화가, 즉 감상자가 하향 처리를 동원하여 이미지를 창의적으로 재구성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즐거운 과정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것이 우리의 창의적인 자아를 자극하고, 많은 감상자들이 특정한 추상미술 작품을 접하면서 느끼는 긍정적 경험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현대 추상화는 두 가지 주요 발전에 토대를 두었다. 형태로부터의 해방과 색채로부터의 해방이다. 조르주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가 이끈 입체파는 형태를 해방시켰다. 그 뒤로 현대 미술은 바깥 세계에 토대를 둔 형태의 자연주의적 창시보다는 화가의 주관적인 전망이나 마음 상태를 나타내곤 했다. 현대에 들어와서 색채를 해방시킨 인물은 대체로 앙리 마티스였다. 그는 색채를 형태로부터 풀어주고, 그리하여 색채와 색 조합이 뜻밖의 심오한 감정적 효과를 일으킬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일단 색채가 더 이상 형태에 구애받지 않게 되자, 특정한 구상적 맥락에서는 "잘못된" 것이라고 여겨졌을지 모를 색채도 사실상 옳은 것이 될 수 있었다. 특정한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내면 전망을 전달하는 데 쓰였기 때문이다.
퍼브스는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관점에서 이 모든 것을 요약했다. "사람들은 색깔이 대상의 속성이라는 개념을 고집한다. 사실은 뇌가 만들어내는 것인데 말이다." 드레스 사례가 보여주듯이, 색깔 지각은 하향 처리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화가는 이 사실을 이용하며, 또한 빨강이 '사랑, 용기, 피' 초록이 '봄, 성장'을 나타내는 것처럼 색깔이 종종 감정을 전달한다는 사실 역시 이용한다. 하지만 모든 사례에서 색깔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보는 이이며, 감상자는 선과 질감에 대해서도 그렇게 한다.
미국항공우주국과도 일한 바 있는 터렐은 18세기에 버클리가 처음 제시했던 개념을 강조한다. 즉, 우리가 시각적으로 직면하는 현실이란 우리 자신이 창조한 현실이라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현실은 우리의 지각적, 문화적 한계 내에 있다는 것이다. 터렐은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설명한다. "내 작품에는 대상도, 이미지도, 초점도 전혀 없다. 대상도, 이미지도, 초점도 없다면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당신은, 보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무언의 생각의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로지 자신의 지각에 의지하며,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경험하는지를 해석할 수밖에 없다.
추상화가들은 세 가지 새로운 전통에 영향을 미쳤는데, 각각 해체에 계속 주안점을 둔 전통이었다.
첫 번째 전통인 '구상으로 돌아간 환원주의자'는 누구보다도 캐츠가 개척했다. 그는 뉴욕학파를 잘 알았고, 해체되고 단순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단색 배경을 쓰기 시작했다. 캐츠는 두 번째 전통인 '팝아트'를 예견했고, 특히 로이 릭턴스타인, 재스퍼 존스, 앤디 워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워홀은 클로스에게 영향을 미쳤고, 클로스는 세 번째 전통인 '해체에 이은 종합'을 개척했다.
추상미술이 감상자에게 그런 엄청난 도전 과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에게 미술을,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추상미술은 우리 시각계에 뇌가 재구성하도록 진화한 유형의 이미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미지를 해석하라고 감히 도전한다.
올브라이트가 지적했다시피, 우리는 생존이 인지에 의존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연상을 "모색한다". 강력한 구상 단서가 없을 때 우리는 새로운 연상을 만든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도 비슷한 점을 지적했다. "마음의 창의력이란, 감각과 경험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재료들을 결합하거나 전환하거나 늘리거나 줄이는 기구에 다름 아니다."
미술사학자 잭 플램은 추상의 이 측면을 "진리에 관한 새로운 주장"이라고 말한다. 원근법을 해체함으로써, 추상미술은 우리 뇌를 상향 처리에 관한 새로운 논리와 대면시킨다. 몬드리안의 작품은 대상을 처리하는 뇌의 초기 단계(선분들과 방향 축에 의지하는 단계)에, 그리고 뇌의 색깔 처리에 심하게 의존한다. 그러나 이 상향 처리는 포괄적이고 창의적인 하향 처리를 통해 완전히 뒫집히거나 수정될 가능성이 높다.
추상미술은 그보다는 모든 미술 형식들에 반응하는 영역들을 활성화한다. 따라서 우리는 배제함으로써 추상미술을 본다. 즉 우리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어느 특정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닫는 듯하다. 어떤 의미에서, 추상미술의 지각적 성취 중 하나는 덜 친숙하거나 아예 낯선 상황에 우리를 노출시키는 것이다.
더 폭 넓은 의미에서, 감상자의 반응은 세 가지의 주요 지각 과정들롤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회화적 내용과 이미지 양식 분석, 이미지가 불러낸 하향 인지적 연상, 이미지에 대한 상향 감정 반응이 그것이다. 이미지의 추상화 자체는 우리에게 현실과 어떻게든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며, 그것은 하향 자유 연상을 자극한다. 그 연상은 우리에게 보상을 안겨준다. 시선을 추적하는 실험을 해보니, 추상미술을 볼 때 우리 뇌는 알아볼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림의 전체 표면을 훑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시각미술은 더 이상 뇌의 시각 정보 상향 처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는다. 입체파 그림처럼 추상미술도 미술평론가 카를 아인슈타인이 "시각의 게으름이나 피로"라고 부른 것을 종식시킨다. "보는 일은 다시금 능동적인 과정이 되어왔다."
감상자가 미술에서 수동적인 참여자가 아니라 나름대로 창의적인 힘이라는 점을 이해한 에른스트 크리스와 에이브러햄 캐플런은 무의식적 정신 과정들이 창의성에 중요한 기여를 한다는 생각을 처음 제시했다. 창의성은 의식적 자아와 무의식적 자아 사이의 장벽을 제거해 비교적 자유롭게, 하지만 통제된 방식으로 양쪽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는 무의식적 사고에 대한 이 통제된 접근을 "자아를 위한 회귀"라고 했다. 감상자가 미술 작품을 볼 때 창의적인 경험을 하므로, 화가뿐 아니라 감상자도 무의식과의 이 통제된 의사소통을 경험한다.
뉴욕의 미술평론가 낸시 프린슨솔은 추상미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추상화한다는 것은 물질세계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국소적 고양인 동시에 때로는 방향 상실, 심지어 혼란이기도 하다. 가장 강력한 형태의 미술은 그런 상태를 유도할 수 있고, 사실적인 내용이 없는 예술이 아마도 가장 그러할 것이다.
느낀 점 :
책의 표지에 이 책의 제목인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는 귀여운 느낌의 제목과는 상반되는 느낌인 [환원주의의 매혹과 두 문화의 만남]이라는 부제가 있었다.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책은 귀여운 느낌의 제목보다는 부제가 훨씬 더 어울리지만 부제가 제목이었다면 우리나라에서 책이 잘 팔리지는 않았을 것 같다. 책의 제목대로 이 책은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내 뇌 작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 미술 작품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기 시작하면서 내게 큰 질문 중 하나는 8세 아이가 그린 낙서와 미술 작가가 그린 그림의 차이가 무엇일까였다. 단순히 설명을 멋드러지게 그리면 되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의 내 개인적인 결론은 작품에 작가의 의도가 반영이 되었는가라는 점이었다.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으면 그저 낙서이고 의도가 있다면 예술 작품이라는 모호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이 기준을 가지고 현대 미술 작품들을 보고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보려는 노력을 해봤지만 알수 없었다.
이 책은 환원주의 분석 기법을 이용해서 작품 감상에 대한 내 질문에 생물학적인 근거를 덧붙여 설명해주고 있다. 과거에 모든 것을 나타내고 표현했던 과거 작품에서는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장면에 감정을 담아 표현해주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느끼면 되었다. 이와 같은 방법은 회화든 사진이든 조각이든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작가가 원하는 순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우리에게 그 감정과 생각을 전달했다. 현대 미술에서는 감상자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비록 사각형에 알록달록 색만 칠해진 작품, 흰 바탕에 검은 동그라미 하나 있는 작품 등이라 할지라도 그 작품을 보고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르는 느낌과 생각을 통해서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감상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작품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 뇌의 시각 처리 과정 및 이를 뇌에서 이해하는 과정을 이용하여 예술 작품의 감상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많은 이야기 중에 내가 놀란 부분은 우리의 삶에 경험에 의해 뇌에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영상 처리를 진행한다는 점을 최근 논란이었던 사진 속 드레스가 흰색이냐 파란색이냐는 사건에 대해서도 뇌 경험에 따라 사람마다 다른 AWB를 적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AWB는 Auto White Balance로 광원에 따라 색 보정를 다르게 하는 영상 처리 기술 중 하나다.). 파란색으로 보이지 않는 내게는 파란색으로 추정을 하는 것이 아닌 바로 파란색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이런 뇌의 시각처리 과정에 의해 우리가 예술 작품들을 바라 볼 때 작가가 의도한 방향으로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낙서가 아닌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다한들 내가 모든 작품에 작가가 의도한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앞으로 예술 작품을 볼 때 기존의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던 것에 추가로 이 작품을 보며 내게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 경험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더 재밌을 것 같다. 기존에는 예술 작품을 보면 "느낌있다.", "잘 모르겠다" 등의 단순한 생각이었는데, 작품을 보고 내게 드는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도 감상자로써 즐거운 경험이 될 것 같다.
삶에 적용할 점 :
예술 작품 구경할 때, 작가의 의도 외에도 내게 드는 생각과 감정은 무엇인지 관찰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