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ng`s Life ★
순전한 기독교 본문
일시 : 2020.01.03
제목 : 순전한 기독교
저자 : C.S.루이스
책 속 문구 :
저는 단지 '우주를 지휘하고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며, 그 무언가는 내 안에서 옳은 일을 하도록 재촉하고 그릇된 일에는 책임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 하나의 법칙으로 나타난다'는 데까지만 말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먼저 도덕률이라는 사실이 정말로 존재하며, 그 법칙의 배후에 어떤 힘이 있고, 여러분이 그 법을 어김으로써 그 힘과 잘못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달리 말하자면 실재 전체의 무의미함- 을 증명라혈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실재의 한 부분 -즉 정의에 대한 나의 개념- 만큼은 전적으로 의미 있다는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옳은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자유 의지를 가졌으면서도 그릇 행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존재를 상상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로서는 그런 존재를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선해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악해질 수 있는 자유도 있는 법입니다. 악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이 자유 의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사람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을 까요? 악을 가능케 하는 것도 자유 의지지만,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 또한 자유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자동기계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피조물들- 의 세계는 창조할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고등한 피조물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으로서, 거기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황홀한 사랑조차 물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입니다. 바로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몇 번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매번 그를 회복시키며 그리스도처럼 일종의 자발적인 죽음을 반복할 수 있게(어느 정도까지는)해 주므로- 이라는 뜻입니다.
제 말의 핵심은, 일정한 인격적 특지을 갖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 말의 핵심은, 이러한 특질이 그 내면에서 싹조차 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외부 조건이 좋은 곳도 '천국'이 될 수 없다는 것, 즉 그들은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그 깊고도 강하며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행복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패할 때마다 용서를 구하고 다시 일어나 거듭 시도하십시오. 많은 경우 하나님이 무엇보다 먼저 도우시는 부분은 덕목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제라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바로 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순결(또는 용기나 성실 같은 다른 덕목들)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과정은 그 덕목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혼의 습관을 훈련시켜 줍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에 대한 착각을 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최상의 상황에서도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실패를 용서받을 수 있기에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지요. 치명적인 실패는 오직 하나, 완전을 포기하고 그 이하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남과의 비교입니다. 즉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경쟁이라는 요소가 없으면 교만도 없습니다.
기독교적인 사랑은 의지(will)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will)을 행하려고 노력한다면 곧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사랑의 감정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감정을 만들어 낼 수는 없으며, 또 우리에게는 이런 감정을 달라고 요구할 권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감정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다운 사람에게만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참다운 사람이란 단순히 선한 개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한 몸 안에 연합되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우며 서로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사람들의 모습이니다. 한 악단에 모여 있는 연주자들이나 한 몸에 속한 신체 기관들 같은 모습 말이지요.
따라서 하나님을 배우기에 정말 적합한 도구는 다함께 하나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인간을 통해 -특별히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통해- 역사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영은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 사이에 있어 온 사랑입니다.
이 삼위 하나님의 생명이 보여주는 춤, 드라마, 또는 양식(pattern) 전체는 우리 각자의 생명 속에 재현되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각 사람은 그 양식 속에 들어가야 하고 그 춤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 외에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나쁜 것뿐 아니라 좋은 것도 전염됩니다. 따뜻해지려면 불 가까이 가야 합니다. 몸을 적시려면 물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기쁨과 능력과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것을 가진 존재에게 가까이 가야 하며, 더 나아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하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맡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만든 생명이 아니라 낳은 생명, 언제나 있었고 언제나 있을 생명을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명에 동참하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우리는 그가 성부를 사랑하시듯 성부를 사랑할 것이며, 그러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가진 이 생명을 사람들에게 퍼뜨리기 위해 -제 표현대로라면 '좋은 전염'을 시키기 위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작은 그리스도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목적은 오직 이것 하나뿐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그분 안에서 신의 아들 속으로 완전히 들어올려졌습니다. 인성(humanity)은 이 한 사례 안에서 이를테면 완성에 도달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곤경은 자연적 생명이 어떤 의미에서 '죽는다'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번번이 자신의 인간적 욕망을 죽이는 길 -가난, 가족들의 오해, 가까운 친구의 배신, 치안대의 야유와 학대, 고문과 처형- 을 택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있는 인성은 신의 아들됨과 연합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이렇게 죽임을 당한 후에 -어떤 의미에서는 날마다 죽임을 당한 후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만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도 같이 살아났습니다.
사람이면서(여러분처럼) 하나님이신(그의 아버지처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실제로 여러분 옆에서 여러분의 가장을 현실로 바꾸기 시작하십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자연적인 옛자아를 죽이고 그 자신의 자아로 바꾸시는 일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잠깐 잠깐 이 일을 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좀더 오랜 기간을 들여 이 일을 하시지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잘 진행되면 마침내 여러분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새로운 작은 그리스도로, 규모는 작지만 하나님의 생명과 똑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로 영원히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리하여 그의 능력과 기쁨과 지식과 영원함에 동참케 하십니다.
"잘 듣거라. 일단 너희가 나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너희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겠다. 너희 자신을 내 손에 맡기는 순간, 내 목적은 오직 너희를 온전하게 만드는 그것뿐이다. 그 밖의 것도 안되고 그 이하도 안 된다. 너희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으니 원한다면 나를 밀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를 밀어내지 않겠다면, 내가 이 일을 끝까지 해 내리라는 점을 명심하거라. 너희가 세상에서 어떤 고통을 대가로 치러야 하든지, 죽은 후에 어떤 알 수 없는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든지, 또 내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든지 간에, 너희가 말 그대로 온전해지기까지 -내 아버지께서 나를 기뻐하신다고 하셨듯이 너희한테도 아무 망설임 없이 "내가 너희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실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결코 쉬지 않을 것이며 너희도 쉬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할 수 있고 이렇게 할 것이다. 그 이하의 것에는 결코 만족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와 똑같이 중요한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이 '돕는 자'가 궁극적으로는 절대적인 온전함에 못 미치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간단한 의무를 지키기 위해 내일 여러분이 시도하는 그 미미하고 서투른 노력을 아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느낀 점 :
C.S.루이스가 누군지 전혀 몰랐다. 기독교로 회심한 분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 변증한 책이 있다는 추천에 읽으며 이런 책이 있구나라고 감탄하는 중에 작가 소개를 보니 나니아 연대기도 있었고, 옛날부터 유명한 분이여서 부모님도 알고 계셨다. 모태 신앙의 장점이자 단점은 기독교 세계관 밖으로 나가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나도 모르게 형성된 믿음 속에 살다보니 이유라는 것이 없었다. 회심한 분들은 저마다의 사연과 경험을 통해서 오셨고 그때의 생각과 경험을 붙들며 나아가시는 데 나는 그런 경험이 없다보니 최근 갈급한 마음 속에 내가 믿는 이 세계관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런 고민을 토로했을 때 부모님은 "누군가 해놨을 텐데 뭘 직접 하려고 하냐"고 하셨는데 이 책을 보니 역시나 내가 궁금한 것들, 정리하고 싶었던 것들은 누구나 하는 생각이었고 이렇게 누군가 멋지게 정리를 해놨었다.
책의 시작부터, 나는 모태신앙인지라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에 대한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이렇게 멋지게 우리는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정리해 놓은 것을 보고 책에 점점 더 빠져들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에 대한 변증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 왜 그리해야하는 지에 대해까지 정리가 되어있다. 이렇게 논리가 펼쳐지는 와중에 내가 의문을 품었던 "왜 하필 자유의지란 것을 주셔가지고 나를 이리 힘들게 하시는 가?" 에 대한 답도 들을 수 있었고, 내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해 모르는 "옛사람인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면 어떤 좋은 점이 우리에게 있을 것인지?"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두 번째 질문의 경우 내가 실제 잠깐이라도 맛을 보면 더 얻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지겠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모른다. 이 외에도 그저 믿고 있었고 그저 이렇게 해야한다고 하더라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야지라고 생각했던 많은 부분들에 대해서, 이 설명이 맞는지 틀린 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실 것이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모태 신앙이기에 그저 이 세상에 속해 있었기에 최근 어려움이 왔을 때도 난 이 세상 밖을 나가는 선택이 아닌 이 세상을 더 제대로 알자는 선택을 했다. 나는 내 주변 지인들 사이에서 가장 불쌍한 놈이다. 이런 놈이 어떻게 주변 지인들에게 예수님을 받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현재보다 더 나은 선택이라고 말할 논지가 전혀 없었다. 아예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까지야 내 처지가 주변에서 가장 불쌍한 놈이다보니 어쩔 도리가 없지만 적어도 알고 싶은데 믿어지지 않는다는 사람들 있다면 이 책을 권하려 한다. 그 다음은 주님이 하실 일이기에.
삶에 적용할 점 :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부분들을 따로 FAQ 형식으로 뽑아볼까? 그냥 책 읽기를 권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