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ng`s Life ★
상처받지 않을 권리 본문
일시 : 2016.07.13
제목 : 상처받지 않을 권리
저자 : 강신주
책 속 문구 :
자본주의적 삶은 너무나 친숙하고 평범해서 우리 삶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길들어 있고, 그로부터 상처받는지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 의식하기 어려운 상처를 일깨우는 학문,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학문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첫째는 이상과 게오르그 짐멜이란 짝입니다. 두 사람을 통해 우리 삶이 자본주의와 도시로부터 얼마나 영향을 많이 받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이란 짝입니다. 두 사람의 도움으로 유행, 매춘, 그리고 도박과 같은 자본주의적 삶의 다양한 편린들을 곰곰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미셸 투르니에와 부르디외라는 짝입니다. 두 사람의 성찰로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면서 얻는, 아니 정확히 말해서 자본주의로 각인된 우리 내면세계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유하와 보드리야르라는 짝입니다. 자본주의는 상품을 소비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체계입니다. 두 사람을 통해 소비사회의 유혹적 논리와 아울러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숙고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골에서의 단조로운 삶의 환경과는 현격히 구별되는 이런 자극적이고 복잡한 도시의 사건들에 일일이 반응하면, 우리는 대도시에서 하루도 견딜 수 없습니다. 자신과 무관한 모든 일은 그저 냉담히 남의 일로 간주해야 합니다. (중략) 오직 나와 직접 관련된 일이에나 정서적으로 반응할 뿐입니다. (중략) 대도시에 적응한 도시인들이 짐멜의 표헌처럼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대해 심장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머리로 반응하게 된" 셈입니다. 도시인들의 자신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수 없는 전략이지요.
그의 분석에 따르면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시골 사람이 주변 세계와 유기적인 일체를 구성하며 삶을 영위한다면, 지적인 도시인은 주변 세계와 얼마간 거리를 두고 살게 됩니다.
푹스에 따르면 패션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합니다. 첫째, 패션은 예링이 지적했듯 상류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계급적인 구별을 두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패션은 계속 매출을 올려야만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패션은 인간에게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점 또한 중요합니다.
바타유의 생각은 "금지된 것은 인간에게 강력한 욕망을 부여한다"는 통찰을 전제로 해서 전개됩니다. 경제 사정으로 지금 당장 구매할 수 없는 상품이 더욱 강렬한 구매욕을 느끼게 하듯이 가질 수 없는 존재는 인간에게 도리어 강렬한 소유 욕망을 심어주게 마련입니다. 이런 금지와 금기의 대상이 성적 대상에 적용될 때 우리가 품는 열망을 에로티시즘이라고 부릅니다. 에로티시즘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사실 금지와 금기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타유가 에로티시즘이 동물의 성적 충동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동물에게는 특정한 금지나 금기에 대한 의식이 없기 때문이지요.
유부남 혹은 유부녀 아니면 신부나 스님과 같은 종교인을 사랑하는 비극적 애정의 경우, 성적 욕망은 더욱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그 혹은 그녀는 결코 손쉽게 소유할 수 없는 대상이기에 우리의 성적 욕망은 무한히 증폭됩니다. 이처럼 성적인 것을 포함한 일체의 욕망들은, 그 욕망의 충족을 미룬 우리의 의지로 더욱더 강화됩니다.
로빈슨이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무인도에 표류한 뒤에 자신이 시간을 자각하지 못하고 지냈다는 점입니다. 오늘이 언제인지, 그리고 내일이 언제인지를 반드시 확인해야만 합니다. 그는 시간을 찾아야만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찾고자 한 시간이 객관적 시간이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과거 베르그송이 말한 체험된 시간이 아니라 시계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베르그송은 체험된 시간을 지속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미래를 가능성으로서 가지지 않은 사람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미래를 계획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
자본주의의 억압을 넘어서려면 가난한 이웃들이 최소한 극단적 생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그들에게는 미래가 단순히 유토피아적 의미에서 잠재적으로 올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가능성의 장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욕을 할 경우, 설령 그것이 당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한 짓이라 할지라도, 당신은 병들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유명인사와 흡사하다고 해서, 여러 사람이 잠시 동안이나마 감탄과 부러움의 시선으로 당신을 둘러싸게 된다면, 당연히 당신은 좋은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알랭, [인간 소묘]
타인으로부터 주목과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과 허영 같은 감정이 있기에 산업자본의 기호가치가 작동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까요?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상품을 필요이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즉 상품의 사용가치보다는 상품의 기호가치를 강조할 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소비자가 다름 아닌 노동자라는 엄연한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소비사회의 화려한 유혹에 물든 대부분의 소비자는 환각의 세계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남과는 다른 자신만의 삶을 추구하며 자신의 개성과 욕망을 분출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남는 것은 불행하게도 돈의 고갈 혹은 빚의 확대일 뿐입니다. 다시 돈을 벌기 위해서 혹은 빚을 갚기 위해서 그들은 노동자의 지위로 산업자본에 편입되어야 합니다.
지표면의 에너지 작용과 그것이 결정짓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유기체들은 원칙적으로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받아들인다. 그때 초과 에너지는 체계의 성장에 사용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 체계가 더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된다면, 또한 그 초과분이 그 체계의 성장에 완전히 흡수될 수 없다면, 초과 에너지는 마지못해서든 또는 영광스럽게 재앙을 부르면서든 간에, 반드시 대가 없이 상실되고 소모되어야만 한다.
선물이란 가장 근사한 사례에서 분명해지는 것처럼 상징적 교환에서, 물건은 객체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이 경우 물건이 두 사람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물의 경우처럼 두 사람 사이에서 물건으로 굳어지는 양도 계약과 물건은 분리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물건은 객체로서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가 없다. 정확하게 말해서 사용가치도 경제적 교환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다. 증여된 물건은 상징적 교환가치만을 갖는다. 이것이 선물의 역설이다. 선물은 동시에 임의적이다(상대적으로). 어떤 물건이든 증여되기만 하면 관계를 충분히 의미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물건은 증여되자마자 -그리고 증여되기 때문에- 선물이지 다른 무엇은 결코 아니다. 선물은 유일성을 지니며, 교환의 유일한 순간에 의해 명확하게 한정된다. 선물은 임의적이면서도 절대적으로 특이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피상적으로 보면 이전 사회보다 더 자유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자유는 돈을 가진 자의 자유, 소비의 자유에 불과할 뿐입니다. 소비의 자유란 결국 돈에 대한 복종의 이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의 자유를 위해서 돈의 노예가 된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세요. 수중에 돈이 없을 때 얼마나 갑갑하고 부자유스럽다고 느끼는지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가 돈이 있을 때만 가능한 그런 성격의 것이라면, 그것은 돈의 자유이지 우리 삶의 자유일 수는 없습니다.
느낀 점 :
책 제목만으로 이 책의 주제에 대해 요새 심리학 분야에서 유행하는 타인과 나의 관계 속에서 상처받지 않고 남과 어울려 살아가는 삶에 대해 강조하는 아들러 심리학의 일종이라고 오해했다. 물론 저자의 서론만 읽고서 바로 나의 생각은 착각이라고 깨달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심리학 서적이 아니라서 실망했다기보다 이미 공산주의를 이김으로 부자들에게는 최고로 여겨지는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상처받지 않을 권리라니 어떤 내용일지 많이 궁금했던 것이 사실이다. 결론부터 언급하자면, 기존의 경제 서적과는 다르게 이 책은 자본주의를 철학적 고찰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 분석해주었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란 것에 대해 폭 넓은 생각을 갖게 되었고, 내 삶 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기존의 나에게 자본주의란 돈이 돈을 불리는 경제 구조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EBS 자본주의]란 책을 통해서 화폐 경제가 발생하고, 산업 혁명이 이루어 짐에 따라 자본이 돈을 버는 사회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역사적으로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화폐가 발달하고, 이에 따른 금융 폐단이 심각해지면 항상 나라가 망해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도 요새 겪고 있지만, 이를 극복할 다른 대안적이 없기에 자꾸 수정 자본주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보면 부의 불평등은 결국 자본이 이뤄내는 것이다. 첨언하자면 난 한국에서 중하층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수저는 없고, 다만 내가 플라스틱 수저라도 이뤄보려고 아둥바둥 노력하는 중이다. 그래서 아마 이런 생각이 강하게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자본주의를 경제적인 측면이 아닌 아주 신선하게 철학적으로 해석해준다. 이 자본주의가 우리 삶과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인지를 예전 철학자,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인용해서 해석해준다. 어찌보면 저자도 나와 같은 시선에서 자본주의를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적어도 부자 입장에서 바라보고 적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말투들이 중간에 있었다.
처음에는 도시와 시골을 비교하여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과 태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시골의 정적인 모습과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이웃 사람과의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삶의 모습을 도시의 산만한 모습과 이것이 원인이 되어 서로 단절된, 개인적인 삶의 모습을 비교, 대조한다. 나는 30년이 넘게 도시에서만 살아 왔기 때문에 시골 사람들의 오지랖이라고만 여겨왔던 것들과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나만의 공간과 남과의 거리감이 내가 원래 타고난 성향이 아닌 내가 살아온 공간에 의해 만들어진 성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로는 계급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자본주의, 세 번째로는 개인과 사회 속에서 영향을 미친 자본주의, 마지막으로 생산과 소비의 측면에서 자본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과정 속에서 자본주의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공간적, 계급적, 개인적, 소비적인 측면에서 알 수 있었다.
남과의 차별화를 위한 소비, 개인의 만족을 위한 소비 등 자본가들은 지속해서 소비를 조장해야하고, 소비의 미덕을 강조해야하고, 소비를 통해서 소비자를 다시 생산자로, 회사의 노예로 구속시켜야 자본주의는 잘 돌아간다.. 이 굴레를 점점 더 키워야만 자본가들은 더욱 더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 많은 토지, 주식, 집 등을 자본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노동하지 않고 벌어들이는 수익은 노동하는 우리의 수익보다 크다. 적어도 노동 수익만을 갖는 사람들에게 회사 근처의 집은 생활을 위한 최소 조건이기에 누구나 자신의 모든 봉급을 집 구매에 목표로 삼고 도전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집 값은 계속 오를 것이다. 그러면 기존 집을 소유하는 사람들은 계속 오를 것이고 시외 편한 곳에 살며 월세를 줄 것이다. 그러면 집을 못구한 사람들은 돈을 벌어야 하기에 월세로라도 그 집에 들어가 살 것이다. 이런 굴레가 없어질 수 있을까? 이 책에는 사실 답이 없다. 대안이라고 할 만한 개념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턱 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불평 가득한 글을 길게 썼지만, 단호하게 말해서 난 공산주의가 싫다. 어릴 때부터 철저한 반공 교육을 받았고, 또 자유 의지가 부재된 공산주의적 삶이 좋을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다만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는 사회. 즉 실패의 자유가 있는 사회. 열심히 한 사람은 더 풍족하게 살고, 게으른 사람은 덜 풍족하게 살지만, 적어도 인간으로써의 삶은 유지하는데 큰 문제가 없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우리는 막연하게만 자신의 빈에 대해 불평을 갖고 있다. 부자는 안되어봐서 생각을 모르겠다. 막연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또 막연한 개념을 내 삶에 어떤 방법으로 영향을 주었는지, 나라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는지 깊은 생각을 해볼 기회를 준 것으로도 이 책은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에서 말하는 도끼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삶에 적용할 점 :
내가 아직은 부족한 것이 많아 혁명가적으로 정확한 미래 사회 모델을 제시할 수도 없고, 리더쉽이 강해서 사람들을 이끌 수도 없다. 다만 지속적인 공부를 통해 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고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는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또한 내 삶 속에도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내 사고 방식이 객관적일 수 없다는 점에 입각해서 다른 부분에 있어서도 성찰을 통해 더 나은 삶을 만들어 가도록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