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ng`s Life ★
농담 본문
일시 : 2019.03.15
제목 : 농담
저자 : 밀란 쿤데라
책 속 문구 :
그래서 나는 엽서를 한 장 사서(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충격을 주고, 혼란에 빠지게 하려고) 이렇게 썼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
부모로부터 오는 편지란 당신이 멀리 떠나온 육지로부터 오는 전언인 것이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편지는 당신이 떠나온 항구, 그토록 진실되게 공들여 일구어져 있던 환경 속에 있다가 떠나온 항구를 상기시킴으로써, 당신은 길을 잃은 것이라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하는 법이다. 그렇다. 그런 편지는 말한다. 항구가 저기, 그대로, 옛날 모습처럼 분명하고 아름답게, 여전히 거기 있다고 그러나 그 해안, 해안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고!
그렇게 해서 나는 내 삶이 연속성을 상실했다는 것, 그것이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는 것, 이제 나는 결국 아무 가망 없이 내가 지금 놓여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마저도,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내 시야는 이 비인격화의 어스름에 적응해 갔고 주변 사람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보다 분명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내가 그들에게 완전히 이방인이 될 만큼 아주 늦은 것은 아니었다.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다.(그 가까움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말없이 고요하게 서로 감정을 공유하는 이런 분위기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방어도 잠들게 하며, 섬세한 영혼도 속된 자도 모두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드느 방식 중 가장 쉬운 것이면서 반면에 가장 드문 것이기도 하다. 그러자면 자신 속에 형성되어 있는 정신적 태도라든가 꾸며 낸 행동과 몸짓들을 버리고 아주 단순하게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의 생각을 다루는 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나름의 규칙이 있는 법이다. 이성으로 여자를 설득하려 하거나, 아주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여자의 의견으로 반박한다거나 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 여자가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이미지(원칙이나 이상, 신념 같은 것)를 파악하고, 우리가 바라는 그녀의 행동과 그 이미지가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궤변을 동원하여)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무엇인든 원할 수 있기는 하지만, 다만 거칠게 행동하고 싶지는 않다면, 그 여자가 자신의 가장 뿌리 깊은 환상들에 맞추어 행동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란 말은 다르게 산다는 것을 뜻하는데 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다는 것, 그리스도를 따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개별적 이해, 개인의 안락과 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 가난한 이들, 모욕당하는 이들,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 무거운 짐이 두려웠고, 내 영혼에서 예수님의 이런 말이 들려왔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은 내일 스스로가 맡을 것이니. 그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
아무것도 용서되지 않는 세상, 구원이 거부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으니까요.
언제나 나는 루치에가 내게 일종의 추상이고 전설이자 신화라는 생각을 즐겨 되뇌어 왔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적인 말의 배후에서 전혀 시적이지 않은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루치에를 알지 못했떤 것이다. 그녀가 실제로 누구인지, 그녀 자체로서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어떤 사람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존재를 오로지 (청년기의 자아중심주의에 빠져 있었던 탓에) 나에게로 (나의 고독, 나의 예속, 애정과 사랑에 대한 나의 욕구로) 곧바로 향해 있는 측면에서만 받아 들였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 내가 체험한 상황의 기능에 불과했다. 내 삶의 이 구체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모든 것, 그 자체로서의 그녀 모습은 모두 간과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나에게 진정 어떤 상황의 기능에 불과했다고 가정해야 한다면, 이 상황이 달라지게 되자마자(다른 상황이 대신 이어지자마자, 내가 늙고 변하자마자) 나의 루치에 또한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은 논리적으로 확실하다.
이 쓸데없는 지난 며칠간을 내 인생에서 지워 버릴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내 인생의 일들 전부가 엽서의 농담과 더불어 생겨났던 것인데? 나는 실수로 생겨난 일들이 이유와 필연성에 의해 생겨난 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내 인생의 모든 일들을 전부 취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일들을 초래한 실수들이 내가 한 실수들이 아니라면 무슨 권리로 내가 그것을 취소할 수 있겠는가? (중략)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내가 제마네크 앞으로 나아가 그의 따귀를 때렸어야 했던 것은 바로 그때, 대학 강당에서, 제마네크가 [교수대 아래에서 쓴 르포]를 낭독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때였고 오로지 그때뿐이었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 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 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자동 보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움직인다.)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예전의 얀이 아닌 다른 얀이 역시 예전의 제마네크가 아닌 다른 제마네크 앞에 서 있는 것이며, 내가 그게게 날려야 하는 따귀는 다시 되살릴 수도 다시 복구할 수도 없이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그리고 우리 운명은 죽음보다 훨씬 이전에 끝나는 일도 있다는 생각, 종말의 순간은 죽음의 순간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야로슬라프의 운명은 이제 그 끝에 이미 도달한 것이라는 생각이 엄습했다.
느낀 점 :
네이버 백과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농담의 뜻은 남을 놀리거나 웃기기 위해 실없이 하는 장난말이나 우스갯소리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이 소설은 농담 한 마디를 남겼다가 풍자와 유머가 금지된 시대 상에 의해 한 젊은이의 인생이 변화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반 공산주의에 대해 얼마나 철저히 배척했는지 풍자와 유머조차 허락되지 않은 사회였음을 보여주며 이를 통해 인간들이 자신과 다른 인간에 대해 얼마나 엄격히 배제하려 하는지나 다수 인간의 소수 인간에 대한 잔혹성도 언뜻 엿보였다. 진리와 상관없이 다수 인간이 추종하는 것에 대한 이견은 허용되지 않는 점에서 현재 사회와 전혀 차이가 없고, 이것은 공산주의 사회의 특성이 아닌 사회 일반의 특성이자 사람들의 특성이라고 생각된다.
루드비크는 여자에게 관심 받기위해 한 농담 한 마디에 잘나가던 공산주의 당원에서 자유주의 사람으로 선언되고 처벌 받기에 이른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제네마크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부인을 유혹했지만, 결국 이또한 제네마크의 원대로 되었고 자신의 복수 자체가 무의미했고 이런 복수극조차 농담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젊을 적 농담을 통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루드비크에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삶을 어느 정도 회복했으나 과거의 일을 잊지 못해 복수를 시도하다가 되려 당한 느낌을 받게 된 루드비크에 이르기까지 생각의 변화를 따라가며 복수란, 기억이란, 농담이란 등 많은 생각과 공감을 하게 된다. 이런 과정 속에서 밀란 쿤데라 소설의 재미가 있는 것 같다.
농담의 정의는 소설을 보면서 궁금하기 때문에 안찾아 볼 수가 없다. 과연 루드비크의 농담이 우리가 생각하는 농담인가? 시시껄렁한 쓰일 데 없는 말이 농담인지 현실을 풍자해서 웃음으로 해소하는 해학, 유머 등에 준하는 말들이 농담이라고 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사전을 찾아봤는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농담으로 예상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루드비크의 삶 속에서 헬레나를 이용한 복수극이 실패가 됨으로 이어지는 농담과 같은 상황. 나 또한 한 번의 잘못된 선택 이후에 연거푸 일어나고 있는 드라마 같은 사건들로 인해 아직도 고통 받고 있는 형편에서 루드비크의 마음에 많은 공감을 했다. 나는 현재 상황들이 농담이었다며 종료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농담의 정의부터 생각이 많은 나로써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바가 농담과 결부되어 정확히 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과거의 지난 실수에 매여 현재와 미래를 보지 못하고 사는 삶을 살지 말라는 것 같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언제나 그렇듯 생각하기 귀찮은 내게 많은 생각을 남긴다.
삶에 적용할 점 :
1. 용서, 복수, 농담, 인간성 등에 대해 생각을 마무리 좀 합시다^^
2. 과거에 매여 현재와 미래를 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용서...하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