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ng`s Life ★
고통의 문제 본문
일시 : 2021.04.13
제목 : 고통의 문제
저자 : C.S.루이스
책 속 문구 :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의 고난을 면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고난이 자신의 고난과 같은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죽기까지 고난받으셨습니다.
-조지 맥도널드 <전하지 못한 설교>
이처럼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로부터 창조자의 선함과 지혜를 유추해 낸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불합리한 일이었을 것이며, 실제로 그런 일이 시도된 적 또한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내재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지,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새로운 도덕적 판단은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판단의 파기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실제로는 과거의 판단 기준이 뒤집힌다 해도) '오리라 기대되었던 주인'처럼 다가옵니다.
(중략) 그런데 가장 큰 시험거리는 그렇게 새 기준을 인정할 때 수치심과 죄책감이 따른다는 데 있습니다. 즉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회에 실수로 들어서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우리를 만드신 주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 목적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를 그의 사랑이 '아주 기쁘게' 머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시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활동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구원이란 이처럼 영원한 순간들을 말소시켜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겸손해져서 자기의 부끄러움을 영원히지고 그 일이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는 기회가 되었음을 기뻐하며 온 세상이 그 일을 알게 되는 것을 기꺼워하게 되는 데 있을 것입니다.
피조물에게 합당한 선은 자신을 창조자에게 양도하는 것 -피조물이라는 사실 자체에 이미 부여되어 있는 관계를 지적으로, 의지적으로, 감정적으로 실현시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기독교의 자기 부인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무감한 상태(Apathy)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합법적인 목적들을 추구하되 하나님을 그보다 앞세울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자세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악한 인간이 지옥의 선고를 받아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모습 그 자체가 이미 파멸을 뜻한다고 자유롭게 -그 두 개념은 결국 같은 의미이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의 특징은 "자기 자신 외의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한다"는 데 있습니다.
느낀 점 :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그동안 고통, 고난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 대해 적은 책들이 많지는 않지만 읽었던 책들에서 공통적으로 인용되던 문장이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고통, 고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많이 인용되는 책인것 같다. 감정적이지 않고 C.S.루이스 변증책 특유의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우리를 만드신 주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 목적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를 그의 사랑이 '아주 기쁘게' 머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시려는 데 있습니다."
어찌보면 참 당연한 사실인데 많이 놓치고 지내는 것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창조물인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 인생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 하나 더 나아가 새로웠던 부분은 사랑에 대한 부분이다. 사랑이 무조건적인 수용과 인내는 아니라는 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바꾸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하찮은 시선과 생각으로는 감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어찌보면 우리도 아이들이 사람다워질 수 있도록 하나하나 변화시키려고 한다. 이런 부분에 빗대어 생각하면 비슷하게 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책 전체적으로 이렇듯 내게 일어나는 고난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이런 것들을 내게 허락하실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하고 있다.
다만,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머리로 이해는 될지언정 마음에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아이가 불치병에 걸려 힘든 가족에게 아이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벌을 주신다고 말하는 욥의 친구들과 같은 행위는 분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저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 앞에 나아가 울부짖어보자는 말 이외에 어떤 말이 합당할까 싶다.
우리가 사랑받을 존재가 되기 위해 주시는 시련이라고 교육의 과정이라고 해도 아픈 건 아픈거다. 무조건 참으라가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이 아픔을 주님께 들고 가는 것을 허락해 주신 것 같아서 이 부분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삶에 적용할 점 :
쾌락 속에서 내게 속삭이실 때, 하나님 말씀을 듣자. 소리치시기 전에 하나님 말씀 잘 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