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ng`s Life ★
결혼을 배우다 본문
일시 : 2018.02.18
제목 : 결혼을 배우다
저자 : 이요셉
책 속 문구 :
'아픈 추억이 쓰린 상처로 남을 수도 있지만, 그 상처를 잘 치유한다면 깊이가 되겠지. 그렇다면 이 친구는 깊이 있는 친구겠구나.'
"정말 헤어져야 하는 이유라면 모르겠지만 대화로 풀 수 있는 거라면 내가 노력할게."
"요셉아, 네가 신랑의 입장이 아니라 신부의 아버지라면 네 딸에게 어떤 결혼식을 선물해 주고 싶니?"
"사랑의 속성 중 하나가 바로 기다림이란다. 네가 지금 속이 타들어 가듯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안단다. 네가 결혼을 준비하며 내 마음을 구했잖니? 나는 이 기다림으로 지금도 수많은 영혼들을 기다리고 있단다."
결혼을 준비하며 서로의 이해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은 서로 간의 결정에 차이가 나는 이유 한 가지를 말씀해 주셨다. 나의 선택이 여러 모로 옳은 것 같고 상대의 의견이 틀린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은 상대에게 책임이 있는 것도, 전적으로 틀린 것도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모든 결정은 각자의 경험과 세계관을 토대로 만들어지기에 그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선택하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른 선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내 주장만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경험하면서 새로운 세계관과 보다 넓은 경험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기존의 가치관으로는 변하지 않던 선택과 결정들이 폭넓은 경험과 이해를 통해 자연스레 바뀔 것이다. 이 신혼여행이 바로 그 이해의 폭과 넓이를 만들어 가기 위해 결정한 여행이었다.
"아내를 맞은 새신랑을 군대에 내보내서는 안 되고, 어떤 의무도 그에게 지우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한 해 동안 자유롭게 집에 있으면서, 결혼한 아내를 기쁘게 해주어야 합니다." 신명기 24:5, 새번역
"우리의 한평생이 짧고 덧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니,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내가 깨달았다! 이것은 곧 사람이 받은 몫이다." 전도서 5:18, 새번역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신뢰와 사랑이 필요한데 그 자양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소모적인 시간이 충분할 만큼 필요하다. 그것은 진정한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거룩한 낭비가 아닐까.
부부는 단순히 시간과 공간의 공유 뿐 아니라 서로의 신앙적 색채까지 함께 점검하고 동의하고 교류해야 한다. 현안 과제들이 아무리 옳은 명분과 동기를 가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 되지 못한 마음 때문에 서로를 불편하게 하거나 다치게 할 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거절당하는 것도 아니고 기존의 가치관을 폐기하는 것도 아니다. 한 몸을 이루기 위한 필수적으로 조율해 가는 과정일 뿐이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존중하지 않아도 지속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지만 부부는 끊임없이 서로를 존중해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면 다 된다"는 말은 신혼의 아주 짧은 시기에만 통용되는 말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성내지 않으며... 그렇게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서로를 존중하고 용납하고 용서해야 "사랑하면 된다"
기도가 잘되어서 기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기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것은 죄인이 아니면, 은혜가 아니면, 자신이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부부가 함께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고난 중에도 자연스레 함께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서로 간에 관계가 좋지 않아도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문제마저도 인생 가운데 꼭 필요한 일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우리는 문제 많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이기에 함께 아파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배우자에 대한 태도도 이와 같아야 한다.
(중략) "나를 사랑해주지 않겠니?라는 주님의 초정은 부부간의 사랑과 복종의 관계를 부부의 성관계에까지 확대시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남편과의 성적인 관계는 단순한 육체적인 관계를 넘어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략) 주님은 육신의 남편이라도 그를 사랑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똑같이 가치매김 하신다. (중략) 그런데 그런 이해를 넘어 아내가 남편에게 대하는 직접적인 행동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반응과 같다는 개념은 매우 당혹스러웠다.
세상은 내가 나의 주인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나의 믿음의 대상도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때론, 부부 사이에서 아내의 부족분을 남편에게 채움 받으려, 또는 자식에게 그 목마름을 채움 받으려 애쓰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누구도 그 목마름을 채워 줄 수 없다.
하지만 결혼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아내를 예비하신 것이 아니라 아내를 위해 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신비 안에서 둘을 하나가 되게 하셨다.
하지만 실망이란 상대의 잘못 때문에 생기기보다는 내가 정해놓은 기대치에 상대가 도달하지 못할 경우에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러기에 나는 실망할 때마다 그 이유를 상대의 잘못으로만 돌리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가진 사람의 기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인생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기대하지 않아야 하지만 그 인생을 통해 일하실 주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기대해야 한다. 믿음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선한 마음을 쌓아 거기서 선한 것을, 한 사람은 악한 마음을 쌓아 악한 것을 냈다. 예수님은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입술에 나오는 말로 쉽게 반응하거나 쉽게 사람을 판단한다. 하지만 먼저 입술에 나오는 말을 가지고 그 사람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모진 말과 악독한 말을 듣고 그 자체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이 상대방의 어떤 마음에서 기인하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위에서 말한 대로 그가 자라온 성장 배경과 경험,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기에 상황과 상대를 오해하게 된다. 각자 나람의 틀과 사고를 가졌기에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렇게 오해한 채로 등을 돌리면 너무 슬픈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아픈 일은 잊어버리고 망각해 버리면 기억에 남지 않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행동과 사고에 영향을 준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그 상처와 아픔을 하나님께 가져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제가 그렇게 아파할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라고 묻고 그분의 대답을 기다려야 한다.
서로의 다름으로 인해 감정이 상한 적은 있어도 지금껏 아내와 싸운 적이 없다. 싸우지 않아도 감정이 상하는데 작정하고 싸운다면 과연 감정과 마음이 버티어 낼 수 있을까. 바울은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라고 말하고 있다.(골로새서 3:12~13)
내 인생의 목적이 자아성취라면 나는 이 선택으로 실패한 인생이 되겠지만, 내 인생의 목적이 주님께 이어져 있다면 순종은 또 다른 과정이라는 믿음이 두려움을 밀어낸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너 때문에 성질 다 버렸다"고 투덜대지만 그것은 원래 자신의 성질이었다. 없던 성질이 생겨난 게 아니라 꽁꽁 숨겨왔던 성질이 누군가에 의해 튀어나온 것뿐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자신의 인내의 한계, 결심의 한계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슬로건을 외치는 것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지루한 걸음 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라 믿는다.
거룩은 일상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엄숙하거나 엄위한 말투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난함을 인정하고 누추한 자신의 풍경 속에 성령님을 초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 위에 자신을 세우는 행동 하나하나가 바로 거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고난을 고난이라 여기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고난이 아니다. 그러한 고난은 돈 주고 살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된다고 믿는다.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기에 어떤 면에서 보면 현실의 교회와 같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그런 교회를 사랑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문제 많은 원수 되었던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몸을 찢으신 것처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문제 때문에 거리를 두고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주님은 그 문제를 끌어안고 사랑하라 말씀하신다. 주님이 주신 마음에 순종하자, 나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옆에 있는 아내를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서로를 향해 실수하거나 아프게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의도하지 않아도 충분히 상대를 서운하게 하거나 불쾌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이다. 결혼 전에는 내 시야를 벗어난 영역을 살피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결혼한 후에는 끊임없이 상대를 용서하고 자신의 잘못을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사탄은 어떤 빌미를 통해서라도 한 몸을 쪼개려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행동이기 때문이다(예배소서 4:26~27). 분을 내는 것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는 부분은 순종에 대한 영역이다.
"주님, 저와 아내가 한 몸이라는데 저는 아프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데 아내는 이렇게 아파하고 있습니다. 한 몸인데 저는 이렇게 멀쩡합니다."
온통 흔들리는 삶, 그것이 두렵고 불안할 때가 많다. 그러나 흔들리는 삶 자체보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쉬운 선택을 하는 것이다. 심장이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쉬워 보이는 선택을 할까 두렵다. 마치 주님이 안계시는 것처럼 선택하고 살아갈까 두렵다.
"하나님, 당신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자신이 없습니다. 은혜 없이는 아내와 마주 보고 누워 있을 수조차 없습니다. 제가 기껏해야 할 수 있는 일은 아내를 제 힘으로 돌아 누이는 것 뿐입니다. 만일 아내의 마음이 저로부터 등져 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자신이 없습니다. 그것은 저 혼자만 진실하고 정직하다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
하나님, 은혜를 주세요. 우리 가정을 긍휼히 여겨 주세요. 살다 보면 생기는 요령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은혜로만 살게 해주세요.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가'는 말씀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주님을 우리 가정의 머리로 인정합니다. 우리 길을 지도해 주세요. 주님, 가르쳐 주세요."
"주님, 자격 없는 제가 아내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남편이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보는 눈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도 알아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만남도 사명도 영혼도 생명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오직 하나님만을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남편은 아내를 만족케 할 수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만족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만족케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다. 우리는 먼저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말로 나의 아버지라고 믿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라. 이 질문에 답을 얻는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도 탄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 답이 희미하다면 내가 살아갈 길도 희미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답이 오늘 내 삶에 선명하다면 우리는 오늘을 선명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모든 두려움은 힘을 잃어 갈 것이다.
똑같은 상황 가운데서 이들은 상반된 진술을 보였다. 이 차이는 바로 눈에 보이는 현상을 두려워 할 것인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중략)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하나의 힘과 같아서 우리를 꼼짝하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더 큰 힘이 미치게 되면 그 두려움은 사라지고 만다.(중략) 두려움은 두려움보다 크신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해결해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은 아내를 사랑해 줄 사람으로 나를 찾으셨다. 상대방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라 여기게 되면, 살아가면서 그 기대만큼이나 큰 실망과 불평이 찾아올 것이다.
"제가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무표정한 표정을 지으면 마음이 어떠셨나요?"
혹은 아내의 친절함과 섬김에 기분이 들뜨는 반대의 상황들을 만날 때도 나는 예수님의 감정을 느끼려고 애썼다. 물론 그것이 주님의 직접적이거나 절대적인 감정이라고 오해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런 연습을 통해 나는 교회 역할을 맡은 아내를 향해 충실하게 예수님의 역할을 맡으려 했다.
무엇보다 온종일 주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물으며 주님과 호흡하기 위해 애썼다. 주님처럼 사랑하기 위해 더욱 애썼고, 신랑 되신 주님의 마음을 더욱 간구했다. 왜냐하면 나는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는 예수님처럼 아내를 위한 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환경과 삶의 패턴으로 형성된 습관과 성경으로 30년 가까이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저 삶의 사이클 하나 맞춘다고 서로 간에 충돌을 피할 수 있을까?
만약 여자가 특유의 다중언어를 사용하는 대신 자신이 필요한 것을 부탁했더라면 남자는 그보다 더한 일이라도 충실하게 수행했을 것이다. 남자는 결코 여자의 속마음을 꿰뚫어 볼 수 없다. 사람은 외모만을 볼 뿐이다.(중략) 내 마음을 상대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서운해 하거나 속상해 하는 대신 내 마음의 이야기와 상대가 알아야 할 부분들을 적절하고 지혜롭게 이야기하는 건 어떨까?
익숙한 대로 관성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다. 좋은 것도 시간이 지나면 그저 익숙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존귀하다고 생각한다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지 않아야 한다. 특히 마음을 다치게 하는 말은 열 번을 호흡한 후에 꺼내라.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한 번 다치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연애 단계에서 생기는 문제는 말 그대로 결혼이라는 언약적인 단계에 들어서기 전이라는 점이다. 이 말은 결혼을 전제로 연애하지만 모든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연애할 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자신과 상대를 욕망으로부터 지키는 일이다.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것보다 상대를 지켜 주는 것이 더욱 쉽지 않다.
나는 다윗과 아비가일 이야기를 좋아한다. 양털 깍는 날에 다윗은 나발의 도발에 분노했다. 다윗과 일행은 칼을 차고 나발의 집으로 향했으나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 앞에 칼을 거두었다. 아비가일은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나발에게 복수한 이 일이 수치가 되면 안 된다고 공손히 일러 주었다. 지금은 복수가 정당해 보여도 시간이 흐른 후에 부끄러움으로 남을 수 있다는 그녀의 충고를 다윗이 받아들인 것이다.
'내가 이만큼 바뀌기까지 주님이 나를 얼마나 오래 기다리셨는가?"
내가 바뀌는데 걸리는 오랜 시간을 감안한다면 상대에게도 필요한 오랜 시간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기도해야 한다. 사랑하는 만큼 기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기다리거나 기도하는 건ㅅ보다 쉬운 행동이다.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랑한다면 기다리며 기도해야 한다.
이미 주님 앞에 죽은 사람인데 나는 죽을까 봐 두려워했다. 먼 미래에 있을 두려움과 근심은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 말은 인생을 계획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막연한 근심과 두려움 대신 오늘의 주님을 바라보라는 이야기이다. 만약 오늘 주님을 바라본다면 아주 작은 방향이 만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젠가 때가 되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살던 대로 생각하던 대로 결정하는 방식대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살아간다. 만약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 자신의 습관대로 행동하지 않고 인생의 핸들을 크게 돌리게 된다면, 그래서 기존과 다른 커다란 각도를 만들게 된다면, 관성과 저항으로 인해 뒤집어지거나 부러져 사고가 나게 될 것이다.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선택과 결정을 하려면 지금부터 아주 작은 방향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내가 만들 수 있는 각도는 아주 작다. 그러나 아주 작은 각을 만들기 위해서도 믿음의 도약이 필요할 만큼 그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지금부터 아주 조금씩 그 각을 확보해서 방향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그 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내가 바로 미래의 내 모습이다. 미래의 내가 주님의 인도하심과 임재 안에 있기 위해서는 오늘 내 발을 비추는 주님의 빛에 순종해야 한다.
주님이 우리 삶을 인도하실 때 당장의 삶의 문제들은 여전한 것 같아 보여도 결국 우리가 만들어 가는 가정을 통해 주님의 아름다운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의 방식을 따랐을 때 우리 인생이 형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더라도 우리의 연애와 결혼, 가정은 아찔한 위기와 심각한 문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 인생을 인도하신다는 의미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형통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과 이어져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 삶을 인도하실 때 당장의 삶의 문제들은 여전한 것 같아 보여도 결국 우리가 만들어 가는 가정을 통해 주님의 아름다운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성공한 인생입니다.
느낀 점 :
살기 위해선지 죽기 위해선지 모르고 떠난 스페인 여행 중에 묵은 숙소의 책 장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의 제목이 내 마음을 찌르기에 펼쳐보았다. 책 내용은 전체적으로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결혼에 대해서 결혼 10년 차인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앙 안에서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는 올바른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나 역시 가정을 이룬다면 신앙 안에서 믿음의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가정이 아니라면 가정을 이룰 생각이 없다는 주의라서 여행 중에도 틈틈히 계속 책을 읽었다.
그 동안의 몇 권의 결혼 생활에 대한 책을 봤었지만 그 당시에는 내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크게 와닿았던 것이 적었다. 이번엔 경험이 많이 쌓여서인지 와닿는 부분이 좀 많았다. 신부가 내 딸이라면 나는 내 딸의 결혼식에 대해서 어떻게 해주고 싶은 가라는 질문에 많은 생각을 했다. 단지 신랑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던 결혼 예식 진행에 대한 내 관점이 내 딸이 결혼한다면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자 많은 부분들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기존 신랑의 입장에서는 앞으로의 삶도 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신부에게 양보하지만 조금 더 아끼고 미래를 대비하며 진행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딸이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더 해주고 싶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결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존 입장에서 허례 의식이라 생각되었던 것도 내 딸이 결혼한다면 아낌없이 주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또한 신뢰가 쌓일 시간이 많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서로에게 신뢰가 쌓일 시간이 없다면 상대방과 나의 대화 방식이나 사고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조그만 오해에도 쉽게 관계가 무너질 수 있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신혼 1년 간은 가정에 집중하라는 내용이 있었나 보다. 함께한 시간보다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가 중요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절대적인 양도 많이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끝으로 순종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다. 남이 볼 땐 조그만할지 몰라도 나한텐 큰 시련이었던 요새 나는 하나님께 밉다고, 나한테 왜 이러시는지 등에 대해 따지고 물었다. 차라리 이런 시련말고 데려가 달라고도 빌었다. 아마 이런 내 모습은 순종과는 거리가 꽤 멀었던 것 같다. 왜 내 인생은 모든 일을 다 경험해보고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서 아직도 이해 안되지만, 죽는 날까지 이해가 안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이런 삶에 하나님께 쓰임 받는 건지도 잘 모르고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고통 가득한 삶도 시간을 벗어난 하나님 시선에선 어딘가에 쓸모가 있다면 따르는 것이 순종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결혼 같은 게 다시 내 인생에 거론될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 당장은 원망보다는 내게 좋은 것을 주실려던 하나님 의도와는 다르게 내가 사단에게 걸려 넘어진 것은 아닌지 혹은 이런 고통 또한 어딘가에 쓰임 받는 것이라면 순종해야지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내게 현재 이 만큼 살게 하신 것 조차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분간은 이렇게 생각하고 조금 더 그 분께 가까이 가보고자 한다. 그래도 안되면 그 때 결정해도 늦지 않으리란 생각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에서 떠난 스페인 여행에서 단지 휴식만 갖는 게 아닌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해준 고마운 책이다.
삶에 적용할 점 :
조금 더 가까이 가보자. 기도가 완전 어려운 지금 더 기도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