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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본문
일시 : 2020.11.15
제목 :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저자 : N.T. 라이트
책 속 문구 :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고, 우리는 그러한 신앙들이 옳을 가능성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적극적인 목적은 (1) 유대교적 배경 및 자료들에 대한 다른 견해, (2) 바울에 대한 새로운 이해, (3) 그 밖의 다른 모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 (4) 복음서 이야기들에 대한 새로운 읽기를 정립하고, (5) 초기 기독교가 시작되었고 그러한 형태를 띠게 된 유일한 이유는 무덤이 실제로 비어 있었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예수를 실제로 만났다는 것임을 논증하며, (6)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세계관의 차원에서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 모든 현상들에 대한 최선의 역사적 설명은 예수가 실제로 죽은 자로부터 몸으로 살아났다는 것임을 논증하는 것이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고대 세계에서 '아나스타시스' 및 그 상당어구들에 관하여 말하였을 때, 그들은 죽은 자들이 죽음 이후에 곧장 옮겨간 실존이 계속적으로 몸을 지닌 실존이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죽음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새롭게 몸을 입게 되는 것, 현세와 같은 종류의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죽음 자체는 슬픈 일이었고, 또한 나쁜 일로 여겨졌다. 정경의 구약성서에서는 죽음을 행복한 놓여남, 즉 영혼이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보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신이 준 선한 것이라고 믿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결과였다. 그런 까닭에, 다음과 같은 전도서의 확고하고 단호한 지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만사가 운행되는 길이기 때문에, 내가 가야 할 가장 좋은 길은 인생을 충분히 누리는 것이다.
죽음은 사람의 불멸의 부분이 하나님에게로 가서 함께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하나님이 그 생기를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제1장의 끝부분에서 예비적인 방식으로 말해 두었고 이제 꽤 많은 본문들을 통해서 예증한 두 가지 점을 파악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다. (a) 부활 신앙은 반드시 이 단어가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입는 것으로 끝나는 두 단계의 우주론적 및 개인적 종말론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한 이야기가 들려지고 있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부활 신앙을 보고 있는 것이다. (b) 히브리어 또는 헬라어로 된 "부활"이라는 단어와 그 동일 어원의 단어들은 이러한 입장 이외의 다른 것을 가리키는 데에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부활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아도 부활 신앙이 서술될 수는 있어도, 부활이라는 단어가 나온다고 해서 부활 신앙이 서술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부활"은 결코 죽음 자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도 아니고, 마치 죽음이 결국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죽음과 "타협하는" 방식도 아니다. (또한 엄밀하게 말해서, 부활은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를 지칭하지 않고, 언제나 첫 번째 단계를 예비적인 것으로 반드시 거치고 나서 오는 두 번째 단계를 지칭한다.) 지헤서 1~3장에서처럼, 부활은 언제나 세상의 선함, 죽음은 세상 속으로 침입해 들어온 악한 것이라는 것, 새로운 몸을 입은 삶이라는 선물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게 할 것이라는 창조주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방식이다.
바울이 세계관적 질문들에 대하여 제시한 대답들은 다음과 같이 쉽게 도표화될 수 있다:
(i)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예수를 부활한 주로 믿는 신앙고백과 믿음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가운데 "메시야 안에 있다": 우리는 새 계약의 백성, 율법을 성취하는 백성, 한 분 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였던 전세계에 걸친 가족이다.
(ii)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선한 하나님의 피조 세게 속에 있다; 피조물들은 여전히 썩어짐으로부터 해방을 고대하면서 애쓰며 신음하는 가운데 있지만, 이미 부활하고 승천한 메시야의 주권 아래에 있다.
(iii)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세계와 우리 자신은 아직 장차 우리가 될 모습으로 구속받지 못한 상태로 있다. (중략) 죄는 여전히 우상숭배를 행하는 인류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도 여전히 독재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iv) 무엇이 해법인가?
장기적으로는 만유 자체를 해방시키고, 참된 공의와 평화가 모든 원수들에 대하여 승리하고, 모든 의인들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며, 그때에 살아 있는 신자들이 변화받는 일을 가져오게 될 창조주의 새 창조의 위대한 행위. 단기적으로는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어서, 도전하고 변화시키고 치유하며 구원하는 그 강력한 역사를 행함으로써 은유적인 의미에서의 "부활" 백성을 만들어내는 것.
(v) 지금은 어느 때인가?
"장차 도래할 새 시대"(내세)가 개시되었지만, "현세"는 여전히 계속된다. 우리는 부활과 부활, 즉 예수의 부활과 우리 자신의 부활 사이의 기간에서, 최초의 부활절 때의 죽음에 대한 승리와 예수가 다시 "나타날" 때에 있을 최종적인 승리 사이의 기간에서 살고 있다.
바울은 현재에 있어서의 성령을 신자들이 새로운 몸을 입게 될 장래의 부활에 대한 보증으로 보았다.
바울이 이제 자신의 다른 진술들에 아주 극적으로 첨가하는 것은 당시의 유대교에서는 전례가 없던 내용, 즉 죽은 자들이 두 단계에 걸쳐서 부활한다는 것(먼저는 메시야, 그 후에는 그가 다시 오실 때에 그의 백성)과 불연속성의 형태(썩음/썩지 않음이라는 구별과 새 사람을 만드는 자로서의 성령과 더불어 두 유형의 인간에 초점을 맞춘)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다.
고대의 유대적인 신앙의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숨 막히는 탐구들은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은 무작위적인 묵상들이 아니었다. 바울은 자신이 취한 각각의 단계를 성경 속에서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단계들을 취할 수 있었던 근거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보았던 것이었고, 그는 기도 및 다른 신자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메시야라는 표현이 예수에게 적용되었을 때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것과 같은 새로운 신에 관한 언어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발견해 나간 것이었다.
부활은 야이로의 딸이나 나사로처럼 단순한 소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에 있어서와 정확히 동일한 종류의 세상 속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을 통과해서 반대편으로 나와서 죽음이 없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할 때, 그는 재정의의 몇 가지 층위들을 열어놓고 있다: 현재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들을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삶. "내세의 생명"이 현재 속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것을 이미 누릴 수 있고 그 생명은 육신의 죽음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미래로 이어질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
부활 백성이다: 즉, 부활절에서 시작하여 성령의 능력을 따라서 세례 및 믿음 안에서 우리를 껴안은 새로운 세상 안에서 형성된 백성.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장차 회복될 하나님의 선한 피조 세계 안에 있다: 현재에 있어서는 고난과 쇠함에 종속되어 있고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지만 장차 구속받을 몸들을 지닌 채.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 사역은 미완성이다: 부활절에 시작된 사업(죄와 사망의 패배)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해법은 무엇인가?
피조 세계 및 우리 자신들의 온전하고 최종적인 구속: 이것은 예수가 다시 나타날 때에 새로운 창조적 은혜의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현재적으로 선취된다.
지금은 어느 때인가?
현세와 내세가 서로 중복되어 있는 시기: 이스라엘이 기다렸던 "내세"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현세"는 여전히 계속된다.
예수의 부활은 그가 메시야라는 것이 옳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메시야였다면, 그는 세상의 참된 주이기도 하다. 부활은 모든 면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급진적인 신앙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이 이미 시작되었고, 그러한 부활을 개시시킨 한 사람은 그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이 꿇어야 할 바로 주님이라고 믿었다.
복음서 기자들 자신과 그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였지만 그 근저에 있는 내용을 파괴하지는 않았던 자료들은 실제로 예수의 처형 후에 제삼일에 일어난 실제적인 사건들을 가리킬 의도들을 지니고 있었다는 결론을 우리는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것들이 단독으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낳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것들을 합쳐 놓으면, 그것들은 충분조건을 형성한다. 우리가 제2성전 시대라는 맥락, 그리고 예수와 그의 선교 활동에 관한 제자들의 믿음들, 이 두 가지에 관하여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그들이 한편으로는 그의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동안 그를 다시 만나서 그가 더 이상 죽지 않고 다시 살아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우리가 기독교의 처음 두 세기 전체에 걸쳐서 살펴보았던 신앙이 분명히 출현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된다.
느낀 점 :
팀 켈러의 책을 읽다가 최근 100년 사이에 부활에 다룬 책 중에는 최고라는 평을 듣고는 야심차게 구매했다. 책의 두께를 확인한 구매 후에도 이것을 봐야 하는지 고민했다. 서론 몇 페이지를 보는 데 몇 시간이 걸리는 내 머리를 보고 포기해야 하는 지 진심으로 생각했지만, 내가 전공자도 아니고 다 이해하는 것은 포기하고 그저 30% 정도 이해해보자고 끝까지 붙들었다. 끝에는 그냥 복잡한 영화를 머리 쓰지 않고 그저 감상하는 기분으로 감탄하며 읽었다. 개인적으로 번역도 정말 큰 몫을 하고 있지만 논리적 전개를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아 읽기 어려웠던 책에 손 꼽지만 그만큼 방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다 이해하지 못한다해도 얻는 게 많은 책이라 생각된다. 내 목표는 30%만 얻자였는데 많이 봐줘야 10% 미만이지 않을까 싶다. 일독한 것에 큰 의의를 두고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부활을 못 믿을 수는 있다. 다만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 못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경부터 외경까지 거의 모든 자료를 다 거론하며 또 다양한 학자들의 추론과 의견들을 거론하고 이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며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며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한다. 꼼꼼하게 모든 논리의 지류를 다 쫓아가며 분석하며 읽은 것은 아니기에 확신할 순 없으나 내 보기엔 방대한 양을 다루며 사소한 논리의 건너뜀도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역사적으로 고구려라는 나라가 실제 했을까라는 질문에 아주 자세하게 답할 수 있을 만한 수준으로 분석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못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란 원래 본인이 실제로 눈으로 보고도 못 믿는다. 본 순간에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라며 헷갈려하는 데 시간이 지나면 더욱 더 내가 본 것이 실제인지 환상인지 헷갈려하며 믿지 못하고 남들이 옆에서 한 두마디 거들면 쉽게 변질된다. 게다가 아무리 이게 진실이다라고 모든 증거를 들이 대도 믿고 싶지 않다며 생각하기 조차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못 믿을 수 있다.
그렇다면 부활을 믿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된 부활을 믿고 있는 것인가?
기존의 난 모태 신앙이기에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하기 귀찮았음을 모태 신앙이라는 사실에 숨겨 보려다 진리에 관심 없었음까지 드러난 꼴이다. 책 보기 직전까지만 해도 내 생각엔 그저 사람들이 죽음 보다 가혹한 모진 고문에도 붙들고 있던 믿음이니까 맞겠지라거나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 자체가 곧 성경은 보증된 것과 일치하니 그러니 부활은 당연하지 않을까 수준의 생각이었다. 정말 모호하고 막연하게 정말 있던 일이니까 후대에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고 확신되진 않지만 안 믿는 것보단 믿는 것이 이득이다라는 생각도 있었다.
이 책을 읽어가면 초대 그리스도교 인들의 믿었던 부활의 의미에 대한 조사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모호함을 두려워하는 습성으로 인해 인간들은 자신이 이해 못하는 것은 이해 할 수 있는 범주로 깍아 내리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 샤머니즘부터 지금까지도. 그래서 인지 나조차도 부활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죽어서 영으로 천국가는 것을 부활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책에서는 고대 그리스 사상에서 부활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조사하고, 유대 사상에서 부활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아 내고, 초대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부활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육체를 입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다라고 말이다. 죽어서 영으로 천국가는 것이 부활이 아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 속의 야이로의 딸이나 나사로처럼 단순한 소생을 의미하지 않고 죽음을 통과해서 반대편으로 나와서 죽음이 없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처럼 믿고는 있는 데 잘못된 것을 믿고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 결국 마귀로부터 내 믿음을 지켜내지 못할 확률이 크다고 본다.
생각이 변하면 행동이 변해야 한다. 작은 사실을 깨우쳐도 이 점이 행동으로 이어져 삶이 바뀌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 하나만 믿는다고 해도 이 점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사람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나는 안타깝게도 아직 생각만 무성하고 행동의 변화가 없다.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내가 바라던 성령 충만함,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심에 대한 확신이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더불어 의심 없이 믿어야 되기에 이런 책들을 읽어 보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믿지 못하는 믿음이 적은 어리석은 자라고. 참 여러가지 말을 되받아 쏘아주고 싶지만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제대로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과 의심하며 알던 그저 알던 간에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열심히는 믿지만 그것이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또한 믿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저 믿어지면 좋은 것이고 노력해서 얻어졌다 해서 비난 받을 일은 아니란 말이다. 나는 솔직히 의심 많고 멍청한 사람이라 그저 믿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참고로 나는 고구려 영토에도 관한 문제에도 교과서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마19:26. 오직 하나님께서만 나를 믿음을 주시고 확신에 이르게 하실 수 있을 줄 믿는다.
삶에 반영할 점 :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증명되었다. 또한 부활에 대한 증거도 충분하다.
이제 머리로 순복하고 마음으로 믿고 행동으로 복종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