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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ng`s Life ★

팀켈러의 부활을 입다 본문

Books

팀켈러의 부활을 입다

퐁~★ 2023. 9. 8. 16:43

일시 : 2023.03.23

제목 : 팀켈러의 부활을 입다
책 속 문구 :
예수님의 부활은 대반전으로, 현재의 삶을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세계와 연결지어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그만한 능력과 틀을 가져다준다.

반대로 그는 자신이 여전히 사도 중에 가장 작은자이며 또한 "죄인 중에 괴수"(딤전1:15)라 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많은 열매를 맺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런 자아상을 잘 모른다. 자만심에 빠지거나 자신을 비하하거나 둘 중 하나를 알 뿐이다. 그런데 바울은 두 가지 사실적 평가를 거뜬히 통합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했지만 아직 전부는 아니다. 그 나라의 현재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장차 올 미래의 많은 부분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가 현존하되 온전히는 아니고 부분적인 만큼, 우리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상당한 치유를 기대하되 완치를 바라서는 안 된다.
여기에 중대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미'의 하나님 나라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아직'을 배제하면, 우리는 모든 문제가 즉각적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하며, 그리되지 않으면 고난과 불행한 일 앞에서 낙심하고 만다. 반대로 '아직'의 하나님 나라이ㅔ 집중하느라 '이미'를 외면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개인의 변화에 대해 너무 비관할 수 있다. 자신이 "더럽혀질까" 두려운 나머지 세상에 참여하지 않고 몸을 사릴 수도 있다.

그러나 C.S.루이스가 말했듯이 누군가를 왕위에 앉혀 숭배하려는 욕구가 여전히 강한 이유는 "육적 본능처럼 영적 본능도 채워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먹을 게 없으면 영혼은 독이라도 삼키게 되어 있다."

물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주님을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요일3:1~3) 그래도 우리는 복음에 나타난 그분의 영광을 일부나마 믿음으로 보고 이를 통해 변화될 수 있다.(고후 4:6)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예수님의 아름다음과 영광을 우리 마음에 충분히 느낄 수 있고, 그래서 그분의 선하심과 사랑과 지혜와 기쁨과 평안이 우리 안에 재생산된다.

+아무도 등장인물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을 믿으면 당신이 송두리째 달라질 수 있다. 다만 지적인 동의만으로는 안 된다.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분과 연합해야만 우리는 변화된다. 그래야만 "그의 부르심의 소망"의 위력을 참으로 경험할 수 있다.

기독교는 입양이나 결혼처럼 신분과 연합이지 당신의 성취를 통해 얻어 내는 보상이 아니다.

우리 마음을 예수님과 그분의 구원 대신 다른 무엇에 두든, 바로 그것이 우리의 감정과 행동을 좌우한다. 우리의 우상에게서 비롯되는 과욕을 죽이려면, 이미 저지른 죄를 회개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죄의 뿌리와 구조를 파악해서 약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특정한 죄의 습성이 자꾸만 마음에 다시 도지지 않는다.

성령의 임재를 통해 구속과 치유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이스는 항상 성공을 희생의 결과로 전제하는 일종의 기복 신앙을 경계한다. "예수님의 죽음 속에 부활이 약속되어 있으나 그 능력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관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 행동의 효능이 확실하여 바라던 결과를 냈느냐가 아니라 그 행동이 예수님의 모본에 일치하느냐다."

우리는 옛 창조세계 내의 규율을 지키는 것만으로 현세를 살아갈 것이 아니라 장차 "의인들의 부활 시에"(눅14:14) 새로운 창조세계에서 누릴 그 삶에 부합하고자 최대한 힘써야 한다.

예수님의 구원은 회개와 믿음이라는 영적 빈곤을 통과할 마음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임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늘 구원하시는 "가난한 자"란 일차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다.

+신자는 어떻게 정의를 실천해야 할까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교착 상태를 낳고 온전한 변화를 막는 정치적 양극화와 혐오를 피하면서도 변화의 능동적 주역이 될 수 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정의를 위해 다른 사람들과 협력할 때 모든 협력자와 파트너를 대등하게 대하면서도 자신이 신자임을 기꺼이 밝혀야 한다.
셋째로, 이상의 모든 이유에서 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광범위한 "국가적 담론"에 뛰어들기보다는 지역에서 벌어지는 구체적 사안에서 정의를 위해 일할 것을 제안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함이나 박탈이나 배척을 애써 자청하라고 권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를 해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세력 앞에서 미련하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말씀도 아니다. 잠언의 가르침처럼 우리는 빈곤과 낙담과 상실을 부를 만한 행동을 삼가야 한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런 곳이다보니 약함과 박탈과 배척이 언제라도 우리에게 닥쳐온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할 때 우리는 저주와 사망을 복과 생명으로 반전시키는 방식으로 반응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영광"에는 아름다움과 중요성과 위대함과 권력이 포함된다. 힘든 것들이 있어 우리는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면, 그리하여 지금부터 연단을 통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겸손과 절제가 더 깊어진다. 내세에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완성될 성품이 현세에 이미 전조를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시민에게는, 바울이 우리가 아는 그 무엇보다도 '지극히 크다'고 표현한, 즉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미래의 영광이 보장되어 있다.

정확히 어떻게 눈물을 씨로 뿌리는지는 시편 126편에 나와 있지 않지만, 어쩌면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시편 전체에 '애통'의 기도가 가득하다. 그 수많은 예를 보면 사람들이 고통과 고난을 하나님께 가져가 그분의 임재 안에서 기도로 풀어낸다. 그리하여 분노와 자기연민과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그런 데 빠지면 그것이 마음에 독소로 작용해서 우리는 더 지혜롭고 나아지는 게 아니라 더 독하고 완고해질 수 있다.

역사가 계속 진보하는 쪽으로 움직여 인간의 상태가 향상된다는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진보 개념을 오랫동안 이어 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떼어 내서, 순전히 자연적 원인으로 시동되고 유지되는 역사 과정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느낀 점 :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이리 재고 저리 재봐도 현재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손해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죄를 쌓기만 한다. 최근 정말 마음 편안하게 크게 웃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안난다.
지나온 삶 속 실패들이 조금 잘 되었다고 교만해져서 넘어진 것이라 생각되서인지, 교만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자기 비하가 심해진다. 자기 비하에 안빠지려다보면 교만해진다.
불가능하다. 내 능력으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내 능력으로는 한치 그 무엇도 할 수 없는데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부활의 권능을 입고 사는 삶도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지 싶다.
나라는 존재는 아직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것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도 머리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몸으로 알아지는 단계로는 내 노력으로 갈 수 없는 것 같다.

어떻게야 할까?
이 부분에서만큼은 이리저리 찾아봐도 하나님께 구하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을 모르겠다.

삶에 적용할 점 :

기도로 구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