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Pong`s Life ★

철학자의 신학 수업 본문

Books

철학자의 신학 수업

퐁~★ 2024. 4. 30. 19:26

일시 : 2023.09.08
제목 : 철학자의 신학 수업
저자 : 강영안
책 속 문구 :
잃어버린 자기 마음조차 찾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느냐고 우리는 물어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비참에 관한 지식 없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 없이 자기의 비참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그 중간을 낳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의 비참과 하나님을 모두 발견하기 때문이다.(파스칼, 블레즈)

요한복음에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 (생략) 세상은 하나님이 선하게 지으신 세계이며,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동물과 인간이 살도록 선물로 주신 장소요 공간입니다.
2. (생략) 세상은 하나님과 적대적인 사람들이요 적대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3. (생략)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4. (생략)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굴복하고 하나님은 세상을 회복하십니다.

세상은 예수를 따라 살아가는 제자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1. (생략) '세상에 기원을 둔, 세상이 주인이 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 '그리스도의 것'이 된 사람들입니다.
2. (생략)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에서, 세상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3. (생략)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람들'입니다.

먹고 마시고, 일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삶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과 주되심을 믿는다고 할 때, 이 믿음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아는 앎과 그가 나의 구주요 주님임을 승인하고 동의함과 그를 신뢰하고 온전히 맡김을 두고 말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는 깊은 사귐과 교제로 나아가는 앎이 있고, 깊은 감사와 그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신앙이 있고, 온전히 맡김과 신뢰로부터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순종의 삶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에 머물 수 없습니다. 믿음의 이런 성격을 알고 나면 믿음과 행위가 하나인가 둘인가 하는 물음은 쓸모없는 질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에는 앎과 동의와 신뢰가 있고 이와 함께 수반되는 사귐과 감사와 기쁨과 찬양과 순종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삶은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앎과 승인, 신뢰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앎과 승인, 신뢰의 삶은 지성과 이성, 감성과 상상력과 의지가 하나로 통합되어 온 인격이 하나로 드러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의 삶은 온 인격으로, 온 몸과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과 주변 환경을 알고, 사랑하고, 공감하고,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는 가운데 감사와 찬양과 기쁨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알기 이전에는 믿어야 하지만, 일단 믿었으면 믿음의 내용을 지성을 통해 탐구해야 한다고 본 것이지요.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하는 것은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성령 하나님을 통해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깨닫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성령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묵상입니다. 루터가 뜻한 묵상은 명상이 아니라 말씀을 입에 담아 중얼거리며 씹고 또 씹어, 그 말씀이 온 몸에 스며들도록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세 번째는 영적 씨름입니다. 영적 시련 또는 고난은 현실의 삶 속에서 무엇을 하든지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면서, 고난 가운데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삶입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듯 삶 속에서 말씀으로 씨름하며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도와 묵상, 영적 씨름이 신학자를 만든다"는 루터의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삼위 한 분이신 그분을 예배하고, 예배를 통해 그 분을 닮아 가는 삶에는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게 하나됨으로 누리게 되는 거룩함과 진실함과 선함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은 단지 사실과 진술의 관계,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과 사물의 상호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주관과 객관, 이를 이어 주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과 역할이 우리가 무엇을 참이라고 판단할 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성숙한 정도에까지 자라가야 하는데, 그 기준이 사랑 안에서 참을 말하고 사랑 안에서 참됨을 행하는 데 있다는 말입니다.

건강한 진정성은 자기성을 확립하면서도 타자에게 열린 관계, 책임 있는 소통의 관계, 초월을 향해 열려 있는 관계일 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사는 삶입니다. (중략)
두 번째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답할 준비를 하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중략)
세 번째 삶의 태도는, 온유와 두려움, 존경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루터는 과학과 상식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약품과 의술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약을 사용하고 치료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하나님은 의학과 약품을 선물로 주셨고 몸을 지켜 보호하여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지성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런 사람들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돌아다님으로써 타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죄를 짓고 있다고 루터는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믿음과 소망을 두고 현재의 삶을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되,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고 평강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의 태도입니다. 한편으로는 삶의 순간순간이 헛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모든 순간순간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로 알때, 비로소 상황에 따라 때를 분간할 줄 아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코헬렛은 우리 삶에 두 가지 모티프가 교차함을 보여줍니다.
하나의 모티프는 '하벨 하발림'입니다.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의식하면서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메멘토 모리'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히에로니무스가 우리에게 늘 기억하라고 일러 주는 삶의 방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타트 엘로힘'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 알고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일상의 삶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강조한 '카르페 디엠'의 삶의 방식이라 하겠습니다. 
이 두 모티프가 우리 삶의 음악을 쉬지 않고 이끌어 주고 있음을 코헬렛은 보여줍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두 모티프가 교차하는 삶의 음악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입니다.

느낀 점 :
철학자라고 하면 왠지 플라톤부터 스피노자 같은 사람들의 글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가 떠 오른다.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유명한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과 같이 무신론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철학자가 신앙을 거론한다는 게 왠지 낯설다.
그 점이 이 책에 더 호기심이 가는 요소 중 하나인 것 같다.

이 책은 유명한 열 가지 구절을 화두 삼아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을 철학한다. 철학이라는 이미지가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주입식 교육으로 얻은 사상가들의 문장 외우기 느낌이지만, 사실 철학한다는 것은 세상을 깊이 생각해보는 것 같다. 세상을 알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과학과 동일한다고 본다. 다만 방식이 좀 다를 뿐.
책 내용 중에서는 작가 따라 생각할 것들이 좀 많았지만, 그 중에 신선했던 부분은 코로나가 언급된 것이다.
벌써 코로나 책에서도 볼 수 있는 단어가 된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고, 그 때 당시에 책에서 언급된 내용들에 대해 내가 알고 있었다면 내 입장 정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지 싶기도 하다. 누군가는 병이야 신앙으로 극복이 되니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분도 있었고, 누군가는 철저하게 방역을 지켜야 하니 예배도 드릴 수 없다는 분도 있었다. 또한 거리두기 규칙을 지키며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만 마스크는 꼭 착용하자라는 중도의 입장도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겪은 전염병, 루터가 겪은 전염병 사례들을 모두가 알았다면 조금은 의견이 수렴했을지 싶기도 하다.

최근 내 개인적인 생각의 화두들만 기억에 남는 법이다보니, 내 기준에서 책을 덮고 기억에 남는 내용은 3가지가 있다.

"알기 이전에는 믿어야 하지만, 일단 믿었으면 믿음의 내용을 지성을 통해 탐구해야 한다고 본 것이지요."
내 믿음의 씨앗을 심어주신 분이지만, 동시에 의심하고 따져보는 걸 좋아하는 내 성격을 몇 십년 넘게 비난하신 분에 의해 생각하지 말고 무의식적으로 반사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게 믿음이려니하며 살아온 시간이 있었다. 도마 같을지라도 믿으면 되는 거 아닌가란 생각을 하기까지, 스스로 믿음 없는 자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계속 외면해왔었다. 지성을 통한 탐구만이 중요하다는 것 아니지만, 나같은 이에게는 믿기 위해 어떤 노력이라도 하려는 처절함 정도로 보고 위로와 격려를 해줘도 좋지 않을까 한다. 나도 그저 믿어지고 그저 하나님을 만났다면 너무 편했을 것 같긴하다.

"먹고 마시고, 일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삶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믿음의 증명이 전도만이 강요되던 내 어릴 적 세상에선, 이런게 싫었던 난 자기 합리화나 내게 어려울 것 같은 내용은 외면하는 등의 정신 승리 기술들을 쓰고 있었다. 나 스스로를 많이도 속이며 살았었다. 그 정신 승리 중에는 노방 전도보다는 삶으로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더 좋은 것 아닌가도 있었다. 허나 내 삶으로는 어디가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욕되게 할까봐 부끄러운 수준이다. 그래도 이거라도 해야하는 데 싶어서 조금이라도 노력하고 있는 부분 중에 하나다.

"자기의 비참에 관한 지식 없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 없이 자기의 비참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그 중간을 낳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의 비참과 하나님을 모두 발견하기 때문이다.(파스칼, 블레즈)"
이 부분에서 나는 내 안에 성령님이 없으신 거 아니란 생각까지 한적이 있다. 오만과 교만으로 인해 인생의 고난을 받고, 비참함으로 그만 살고 잡다는 우울한 생각에 빠져서 지낸다. 그 중간. 딱 한 점. 그곳이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할 곳인데 난 그곳에 다다르는 게 너무 어렵다. 천국의 소망을 알게 되면 된다는데, 우울했을 때의 나는 지금이 불행한데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인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도 있고, 하나님도 우리에게 주신 이 삶을 행복하게 살면 더 좋아하시지 않나 등등의 반론을 혼자 많이 생각한 적도 있다. 다만 난 그들이 말하는 천국 소망이 얼마나 값지고 위대한 지 본적이 없는 자라 이랬다는 것을 인정하고 난 뒤는 이런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으나 아직은 교만과 비참 사이 중간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서야할 그곳을 찾기가 참 막막하다.

책을 읽는 시간이 신앙에 대한 여러 생각을 고찰해 볼 시간도 되었지만, 철학자와 함께 유명한 말들에 대한 진위를 파헤쳐보는 재미도 있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