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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ng`s Life ★

바울 평전 본문

Books

바울 평전

퐁~★ 2024. 4. 30. 19:27

일자 : 2023.11.23
제목 : 바울 평전
저자 : 톰 라이트
책 속 문구 :
성전을 세움은 하나님의 영역('하늘')과 인간의 영역('땅')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었다.

그러나 성경에 더 합당한 설명은 하나님이 소위 자연계의 인과 법칙 안에서도 기이한 일을 꾸준히 행하신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갑작스럽고 충격을 안겨 주는 새 사건도 결국 하나님으로 귀결되는 더 커다란 인과법칙의 연속선 안에 놓고 볼 것이다.

왜 사울은 아라비아로 갔을까?
그와 엘리야의 유사성 -두 사람의 말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가 아주 비슷하고, '열심'에 관한 생각이 딱 들어맞는 것으로 보아, 바울도 틀림없이 엘리야와 같은 일을 하려 했을 것이다- 은 그도 엘리야처럼 언약 비준이 이루어졌던 곳으로 되돌아가려고 시내산으로 순례 길을 떠났음을 일러 준다. 그는 한 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이 "극도로 열심"이었지만, 이제 그의 포부와 그의 세계관 저넻가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설명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는 그 하나님께 "가서 새 왕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스어로 분명 '충성'을 가리키는 한 단어가 바울이 좋아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인 피스타스pistis다. 이 말은 보통 '믿음'으로 번역하지만, 종종 '신실함', '신뢰할 수 있음'이라는 의미도 지니며, 당연히 '충성'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피스타스라는 말은 -믿는 사실은 물론이요 믿은 것 또는 믿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인 '믿음belief'이란 의미의 '믿음faith'을 뜻할 수 있는데, 이 조그만 한 단어로 이미 아주 충분한 의미를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러나 피스타스는 어떤 진정한 믿음에 함께 따르는 개인의 헌신을 가리킬 수도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예수가 이제 온 세상의 정당한 주권자이신 '주'이시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피스타스는 '성실'이나 '충성'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카이사르(로마 황제)가 그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이었다.

이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생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 시대 유대 역사를 잠시만 훑어봐도, 누군가 이미 메시아가 왔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그저 우리가 말하는 어떤 '종교적'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그런 주장은 한 분 하나님이 당신이 오래전에 하셨던 약속을 마침내 행동으로 옮기고 계신다는 뜻이었으며, 그 행동 방식이 새로운 체계, 새롭고 권위 있는 통치를 확립하게 되리라는 뜻이었다.

그 시대 유대인은 언제나 이런 선언을 심오한 신학을 함축한 선언으로 여기곤 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우리가 '정치적'이라 부를 법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선언을 새 세상, 새 주인에게 충성하는 새 공동체를 선언하는 것이요, 한 분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심을 마침내 세상에 드러내신 것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는 예수에 관한 메시지('좋은 소식', '복음')을 선포할 때 그와 비슷한 일회성 사건이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듣는 이들의 마음과 생각과 삶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리라고 믿었다.

고난은 단순히 신실한 사람들이 그 종착지에 이르려면 거쳐 가야할 어떤 것이 아닌 것 같다. 고난은 그 자체로 이 세상을 통치하던 어두운 권세들이 기진맥진하여 나가떨어지게 할 방법이요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단번에 거두신 승리가 이 세상에서 실행될 방법이다.

중요한 점은 바울이, 열심 넘치는 유대인이라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향한 '충성'이 가장 중요하다 여겨지던 세계에서 다음 넷을 믿었다는 사실이다. 그 넷은 (1)메시아 예수가 하나님의 목적에 철저히 신실하여, 그가 다른 곳에서 말한 대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는 것, (2)예수를 따르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바치는 가장 중요한 충성의 표현으로 봐야 한다는 것, (3)예수를 따르는 자임을 외부인에게 보여 주는 표지는 예수를 믿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 (4)이 예수 형상을 한 충성이 정말 중요하더면, 율법이 말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예수를 따르는 이들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임은 모든 이가 알았다. 그러니 이제 다른 민족이 들어온다면, 모세의 율법이 부여한 제약이 더 이상 타당하지 않은 새 시대가 시작된 셈이다.

바울이 한 분 하나님께 철저히 충성하지 않았던 순간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라는 충격적 형상 속에서 당신의 오랜 목적을 드러내셨으며, 그것이 만물을 바꿔 놓았다.

이 세상의 통치 권력들이 장차 그들에게 책임을 추궁하실 한 분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목적으로 그 통치권을 행사한다고 믿었다.

여러분이 이미 새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면, 새로운 행동 방식이 이미 존재한다.

이스라엘과 유대 문화는 언제나 '하늘'과 '땅'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으며, '자연 재앙'을 나타내는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가 사회 및 정치 상황의 큰 격변이라 부를 법한 일이 지닌 의미를 표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메시아 안에서 세워졌으며 마지막에 완성될 것이다. 그 나라가 완성될 때 온 세상을 아우르는 영광스러운 유업이 메시아와 그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리라고 약속되었다. 그러나 그 나라의 핵심은 하나님이 만물을 바로잡으시고 인류를 회복시켜 본디 인류가 가졌던 역할과 명예를 되찾아 주시며, 순전한 인간성을 썩게 하고 파괴하는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이들은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주의를 임의대로 적용한 결과가 아니다. 이는 분석에서 나온 진리다.

바울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배우길 원한다. 규칙과 원리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달달 외워 흡수하지 말고, 진정한 인간으로서 성장하여 "명확한 이해에서 나오는 모든 풍성함"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신비를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있기를 원한다. 이 모든 일은 그 '신비'를 드러내신 분이 바로 예수 바로 그분임을 그들이 깨달을 때에 일어날 것이다. 메시아 그분이야말고 그들이 "지혜와 지식의 모든 숨겨진 보화"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바울은, 에베소나 고린도에서도 그랬듯이, 로마 황제가 주라고 뻐기지만 사실은 바로 그 앞에 있는 예수가 참된 주이심을 열렬히 선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선포에 따를 희생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목적이 늘 염두에 두었던 일이, 그가 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처럼 그 식구들의 죄가 용서 받은 단일 가족, 곧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가 된 한 언약 가족이라는 새 실재를 수립하는 수단으로 메시아 예수를 '제시하심'이었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그것이 로마서 첫 부분인 1~4장의 요지다.

이 믿음, 이 신뢰, 이 성실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나타내는 배지badge였다. 바울은 한 분 하나님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과 부활 사건을 통해 언약에 신실하심을 보이셨음을 보았다.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분"을 믿는 모든 이는 이제 그 언약의 완전한 지체가 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성실한 믿음으로 그 약속을 붙잡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시는 하나님을" 믿음이 아브라함 가족의 식구임을 나타내는 유일무이한 배지가 될 것이다. 그 가족은 할례로 만들 수도 없고(할례는 창세가 15장보다 뒤에 덧붙여졌다) 율법을 따름으로도 만들 수 없다(이 역시 수백 년 뒤에 덧붙여졌다). 그 가족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신선한 행위이며, 사람은 이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가족의 일부가 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간단히 말하면 이런 의미다(바울이 터키와 그리스 지역을 두루 다니며 이 회당 저 회당에서 설명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창세기 자체와 이후에 나온 수많은 유대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을 부르심은 하나님이 아담의 죄에 제시하신 답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아브라함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이 단번에 죄를 처리하시고 그 죄가 가져온 죽음도 처리하시겠다는 약속이다.

"메시아는 율법의 목표"이시므로, 믿는 자는 모두 언약 지체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

예수의 죽음으로 어둠의 권세들이 완전히 격파되었으며, 이 죽음을 통해 죄(애초에 인간이 어둠의 권세들에게 노예 노릇을 하게 만들었던 죄)가 용서 받고, '거룩해진' 새 백성 안에 이방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던 장벽이 사라졌다. 이처럼 '죄 용서'는 '이방인을 포함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며, 이방인이 하나님 백성 안에 포함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죄 용서' 때문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형상을 가진 자가 되는 것, 하나님의 지혜와 질서를 이 세상 속에 되비치며 온 피조 세계가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찬미를 되비쳐 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바울 복음과 윤리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온 세상을 바로잡으실 것이다. 그는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미 그 일 가운데 큰 작업을 마치셨다. 이제 하나님은 복음과 영을 통해 사람들을 바로잡으심으로써, 이 사람들이 복음이 행하는 일의 본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세계를 더 깊이 있게 변화시켜 가는 대리인이 되게 하신다.


느낀 점 :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이라는 책을 통해 톰 라이트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그동안 성경 속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현대 시대에 기준으로 해석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초기 그리스도인의 생각에 대해서 알기를 원했다. 특히 고대인들을 무시하며 고대인들은 미신을 많이 믿었으니까 사람의 부활도 믿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여러 문헌들을 역사적 기법으로 조사한 결과 고대인들조차 사람의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 현대의 사람들, 특히나 내가, 믿기 어려운 부분들은 내 이해도에 맞추서 사실 고대인들의 무지로 인한 서술들이 있지 않을까 했었던 부분들을 반성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단어가 그 당시에도 같은 의미로 쓰였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다. 언어의 의미는 최근에도 계속 바뀌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바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 평전은 아무래도 바울의 삶 자체에 자세하게 알려진 것들이 없고 그의 저서나 사도행전으로 재구성되고 있기 때문에 공백이 많다. 로마에 투옥된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듯이 말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일반적인 위인전 같은 느낌은 아니고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서들을 바탕으로 나름 순차적으로 바울의 삶 속에서 생각의 변화나 그의 주된 생각들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파고들고 있다. 간단하게 서술이 된 부분에서도 바울의 작성 당시의 상황을 추정하여 어떤 생각으로 이 글을 썼는 지를 상상하며 읽다보면, 점차 바울 신학에 대해 한층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것 같다.

이와 더불어 내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목사님 설교 시간에 졸면서 들어서인지 막연하게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이 있었다. 최근 다양한 책들을 통해 바로잡고 있는 중인데, 이 책에서도 많은 내용을 교정 받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하늘"이 내 머리 위 우주 밑에 있는 그 하늘이나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곳을 의미하는 것이고, 유대인의 생각에 성전은 단순 건물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만나는 거룩한 곳이라는 것, "마지막 때"도 고대 유대인의 생각에 비추어 추정해보면, 성전이 무너지는 때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 등등이다.

"여러분이 이미 새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면, 새로운 행동 방식이 이미 존재한다."
최근 책들을 보며 어릴 적 영어 배울 때 배운 현재 완료 시제의 그래프가 가끔 이 내용을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오게 된 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죽음 이후 부활 시대를 맞이하여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지금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다만 앞서 모든 말씀을 내가 믿을 수 있을 범주로 수정하는 죄와 같이, 내가 걸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변하지 못하는 이유를 능력이 없어서라며 노력도 전에 먼저 안되는 이유를 만들고 있는 내 옛 사람을 보며 참 할말이 없다. 바울의 권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한 몸된 교회를 이루어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나는 참 세상에 잘 녹아 어울어져 사는 것 같다.

어릴 때 내 신앙 세계에 어른들은 그저 믿어야 한다고 하셨다. 의문을 품으면 도마처럼 나쁜 사람이 되는 거다(실제로 나쁜 사람이라는 단어를 쓰시지는 않으셨겠지만 어린 내 마음 속에 신앙에 대해 의문을 품는 다는 건 못난 사람, 나쁜 사람 등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다). 세상에 참 잘 섞여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방탕하게 보낸 20대를 지나 넘어짐의 연속이었던 30대에 이르러서야 어릴 적 신앙을 다시 찾아 보게 되었다. 어릴 때의 믿어지는 척의 위선은 이젠 필요 없었으므로 진실하게 나를 바라 보고 난 뒤, 그제야 난 그저 믿어지지 않으니 책을 봐서라도 믿으면 되는 거 아니냐. 꼭 제일 믿음 있는 사람이 아니여도 도마처럼이라도 믿으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오랜 세월을 신앙이란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저 믿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의심이 들 때 외면하고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성경을 더 읽어 볼 것을 그랬단 후회도 든다. 그 뒤 어느 날 들은 설교 중 아레오바고 광장 이야기나 바울 평전에서 바울이 사람들에게 "생각하기"를 권면했다는 말에 읽기에 이르기까지, 내가 살고 있는 방향이 틀린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니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지금은 내가 도마처럼이라도 믿으면 다행 아니냐라는 목소리를 더 크게 낼 수 있게 되었고, 여기에 붙여 믿음이 더 단단해지는 효과도 있다고 말 주변도 좀 늘었다. 또 진지한 묵상은 못하지만 이렇게 신앙 서적을 읽으며 믿음의 선배들의 묵상을 따라하는 것이라도 하는 것이 어딘가라며 책을 읽고 있다. 40대에 접어 이제와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생각이 든 것조차 어쩌면 내 안에 나도 어디 계신지 모르는 곳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나를 은혜로 인도해주신 것 같아 참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