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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ng`s Life ★

천종호 판사의 선/정의/법 본문

Books

천종호 판사의 선/정의/법

퐁~★ 2022. 5. 6. 11:48

일시 :  2022.05.04
제목 : 천종호 판사의 선/정의/법
저자 : 천종호
책 속 문구 :
아담과 하와의 범죄(원죄)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화해가 불가능한 적대 관계가 되었는데, 아담과 하와의 혈통을 물려받은 인류는 피상속인인 아담과 하와의 지위를 포괄적으로 상속받게되므로 하나님과의 적대 관계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받았던 전적 타락이라는 벌도 상속받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공동체주의가 지향하는 '공동선'의 실천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공동선을 지향하는 공동체주의가 전제하는 공동체는 우연히 공동의 터전에서 살아가는 단순한 동맹이 아니라, 공동의 터전에 살기 위한 결사 혹은 서로 간의 불의를 방지하고 교환을 용이하게 하는 결사 이상의 것으로서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고 최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유대적 공동체'다.
둘째, 공동체주의는 공동체가 존재하는 목적이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가치 중립적인 자유의 보장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의 '좋은 삶' 내지 '가치로운 삶'의 보장에 있다고 본다.
셋째, 공동체주의는 좋은 삶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견해를 배격하고 공동선을 달성하기 위한 '시민의 덕(virtue)'을 함양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한 덕에는 정의, 충성, 우애, 헌신, 희생 등이 있다.
넷째, 공동선을 지향하는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와 달리 '사회 정의'의 실현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다섯째, 공동체주의는 해외 대리모 출산이나 장기 매매 등과 같은 행위를 사회적으로 수용하는 것의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자유주의가 신봉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이 침입할 수 없는 규범을 정립해 공동선을 위한 규범의 타락이나 질 저하를 막고자 한다.

월터스토프의 설명에 따르면, '의(옮음)'라는 단어는 실생활에서 세 가지 맥락에서 사용된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누구에 대해서 옮은가?'라는 것으로 '관계적 측면에서의 옮음'이다.
두 번째는, '무엇에 대해서 옳은가?'라는 것으로 '행동 방식에서의 옮음'이다.
세 번째는 옳음을 지향하는 '인간 성품에서의 올바름(옳음)'이다.

현대 정의론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아래에서 보듯이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정의론은 '사회'를 전제로 한다.
둘째, 정의론에서 논해지는 기본 내용은 '사회(공동체) 구성원 상호 간의 대우 문제'다.
셋째는, 정의로은 사회 구성원 상호 간의 '정당한(옳은) 대우'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넷째, 정의의 문제는 사회 구성원들이 정당한 대우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구성원들의 삶의 방향을 이끌 규칙을 만들고, 사회 질서를 정립'하는 문제다.

정의의 공동체를 무시한 채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할 수는 없다. 정의는 최소한의 사랑이고, 사랑은 정의의 최대한이다. 우리 삶은 정의를 무시한 채 사랑으로 비약할 수 없다. 각자에게 정당하게 대우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정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희생과 용서로 이루어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인간을 인간답게 대우한다는 것은 인간을 그의 능력과 역량에 관계없이 존엄성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대우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대우의 방식은 바로 존중과 배려다. 존중이란 인간을 그 능력이나 역량에 관계없이 그 존엄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배려란 인간마다 능력과 역량에서 차이를 보이므로 능력과 역량의 부족이나 결여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그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배려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 실현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성품(덕)으로서의 정의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실현할 수 있는 내면의 성품 상태라고 할 것이다.

먼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소유권이 아니라 관리권(청지기권)에 불과하므로 자연을 다스릴 때 소유자의 뜻을 올바로 헤아려야 하고 월권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자연을 다스려야지 반대로 우상으로 숭배해서는 안 된다.

아담이 하나님에게 받은 사랑을 온전히 갚는 길은 하나님과 아담 자신을 제외한 타자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선악과 명령에 관한 구절을 주의 깊게 읽으면 하나님이 그냥 특정한 나무 한 그루를 지적하시면서 이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따 먹지 말라고 명령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명령 체계를 통해 하나님이 의도한 바는 인간이 단순히 선악과를 따 먹지 않기만 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성품이 선악과를 향한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계속 담고 있어야 진정으로 선악과 명령을 지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중략) 결국, 선악과 명령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바는 외적 규범인 하나님의 명령을 인간의 내적 규범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정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외적 규범의 내적 규범화, 다시 말해 규범의 가치화를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유익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유'다.

우리가 법을 지키는 이유는 단순히 불이익이나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성품을 창조의 텔로스(목적)에 맞게 조율하고, 그러한 성품 상태에서 그 텔로스에 합치되는 행위를 함으로써 자유를 이루기 위함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우리가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어떤 생각을 억압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행위가 현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까지 -그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반대하는 사람에게까지- 강도질을 하는 것과 같은 악을 저지르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의견이 옳다면 그러한 행위는 잘못을 드러내고 진리를 찾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설령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것은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대비시킴으로써 진리를 더 생생하고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대단히 소중한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낳는다"는 영국의 경제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충고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참다운 진정성은 자신이 선언한 신념에 따라 삶을 살고 그 삶의 최종 결과에 정직하게 책임을 지는 것이다.

 

느낀 점 : 

선, 정의, 법은 기존에 인기 였던 [정의란 무엇인가] 등등의 책에서 논했던 도덕, 윤리, 법 등에 대한 이야기들과 맥락이 유사하다. 다만 이 책에서는 개인에서 나아가 공동체로 초점을 맞췄고, 여기에 더해 기독교적 공동체의 특징을 더해 설명하고 있다는 점들이 다르다. 여러 관점에 대해서 여러 사례를 들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런 부류의 책을 읽으며 중요한 것은 결국 내 스스로가 생각해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생각해보고 내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데, 그게 참 쉽지는 않다. 나만의 답을 찾는 다는 것부터가 어렵다. 그저 이런 책을 읽으며 이럴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해보는 것도 삶에서 중요한 시간이었을 거라 위로해 본다.

작가분이 아무래도 판사란 직업을 가지고 계시다보니 법조인다운 해석이 눈에 띈다. 
아담이 지은 죄, 원죄를 왜 우리도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과거 게놈 관련 사업 일을 하시던 분께서는 자손을 낳을 때 우리의 죄성이 유전적인 정보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유전적으로 아담의 죄성을 갖고 있다고 설명하셨다. 판사인 저자는 흥미롭게도 상속 관계에 기인해서 설명한다. 아담의 자손인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상속을 받았는데, 아담의 죄 또한 같이 상속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부분은 청지기권에 대한 설명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처음 생각해 보았는데 절묘한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청지기권은 우리가 주인된 권리가 아니라 관리권만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관리권만 주셨는데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소비하는 것은 월권 행위인 것이다. 저자의 글을 듣고 나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니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은 우리는 단순 관리 대리권만 받았는데 처분까지 맘대로 하는 것이니 권한 없는 대리가 되는 것이며, 본래 하나님 것이니 하나님의 뜻에 맞게 관리하는 것이 당연하지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책을 읽으며, 내용과는 조금 상관 없지만 혼자 문득 생각하게 된 부분은 글 중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단어였다. 선악과에 대해 그저 약속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서 선악을 알게 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좀 더 생각했다. 하나님은 선이시다. 악과 공존하실 수 없으시다. 악을 모르던 상태의 아담은 이제 선악과를 먹고 악을 알게 되었다. 결국 선악과를 먹으면 죄인이 된다는 것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라는 이름에서부터 정해져 있던 사실 같다.

"정의는 최소한의 사랑이고, 사랑은 정의의 최대한이다."
개인 경험 상 교회 공동체에 좋은 기억은 없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자기 유익만 구하는 사람이 있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타인의 헌신을 강요한다. 요새 유행하는 단어로 흡사 가스라이팅 당하는 기분이다. 어릴 때야 그저 내가 죄인이구나 싶었지만, 요새는 조금 당당하게 외쳐본다. 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써 올바른 상태는 아니기에 부끄럽다. 그렇다고 교회 공동체에 나가 사람을 무조건 견뎌내기에는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마치 앞집 산다는 이유로 처음 만난 우리 집 구경오겠다고 집 밖에 나가는 우리를 지나쳐 우리 집에 들어가는 앞집 아줌마처럼 무례한 사람들에 치일 생각만해도 힘든 건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도 사랑으로 품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일진대 그래서 더 깨닫는다. 나로써는 정녕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작가님이 의도는 이것이 아니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정의, 예의가 지켜져야 사랑을 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무조건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감내하라고 하기 전에 공동체 안에서 정의, 예의가 지켜지게 서로 간에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삶에 적용할 점 :

"참다운 진정성은 자신이 선언한 신념에 따라 삶을 살고 그 삶의 최종 결과에 정직하게 책임을 지는 것이다."
진정성 있는 삶을 살아 보자. 내가 선언할 신념, 내가 살아갈 신념을 깊이 생각해보고 그에 맞게 살아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