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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ng`s Life ★

용서를 배우다 본문

Books

용서를 배우다

퐁~★ 2023. 9. 8. 16:49

일시 : 2023.08.15
제목 : 용서를 배우다
저자 : 팀 켈러
책 속 문구 : 

예수님은 용서에 한도를 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용서는 일종의 자발적 고생이다. 복수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은 대가를 자신이 치르겠다는 선택이다.

용서하려면 첫째, 죄를 그저 양해하는 것이 아니라 처벌받아 마땅한 죄로 사실대로 지적해야 한다.
둘째, 가해자를 자신과 다른 악한 존재로 볼 게 아니라, 같은 죄인으로서 그와 자신을 동일하게 여겨야 한다.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야 한다.
셋째, 복수를 꾀하고 되갚을 게 아니라 빚을 스스로 부담해 가해자를 의무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끝으로, 관계를 영영 끊을 게 아니라 화해에 힘써야 한다.
이 네 가지 행동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빠뜨리면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예수님의 이 마지막 문장은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이 변화되어,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기독교의 용서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로 수직적 차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용서다.
둘째로 내면적 차원은 우리가 가해자에게 베푸는 용서다.
셋째로 수평적 차원은 우리가 가해자에게 내미는 화해의 손길이다.
수평적 차원의 용서는 내면적 차원에서 비롯되고, 내면적 차원의 용서는 수직적 차원에 근거한다.

그리스도인이 "굳게 참고 견디며 최종 복수의 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이 땅에 고난당하는 종으로 오셨고, 그런 주님을 우리도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재림 때는 그분이 재판장으로 오셔서 모든 악을 바로잡으실 것이므로, 우리는 소망으로 인내하며 그 날을 기다려야 한다.
이 설교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그리스도인에게 복수하지 말고 인내하며 원수를 사랑하라고 촉구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을 상대로 자행된 불의를 축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용서의 의미로 쓰인 히브리어 어근은 세 가지다.
하나는 죄를 덮는다는 뜻으로, 으레 동물 제사와 연관되어 쓰였다.
다른 하나는 사면하거나 남 탓을 그만둔다는 뜨싱며, 이 역시 제사와 연관되어 있다. 
걷어 내거나 치워 버린다는 뜻의 또 다른 어근은 죄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긴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이 마지막 어근은 하나님의 용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용서를 표현할 때도 쓰였다.

용서란 자격이나 공로를 갖추어 얻어 내는 게 아니다. 다른 모든 선물처럼 용서 또한 은혜와 사랑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다만 베푸는 쪽의 희생이 따른다.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는 증거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고 용서하는 역량이 자란다는 것이다.

규율도 없고 징계도 없이 자녀를 응석받이로 키우는 부모는 역설적으로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부모는 자녀에게 저주와도 같아서 자녀들은 평생 정서적 혼란을 겪는다. 한계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유월절을 지키도록 지시하신다. (중략). 여기서 두 가지 놀라운 진리를 볼 수 있다.
첫째, "멸하는 자" 즉 하나님의 진노로 악과 죄를 처단하는 천사는 애굽 사람의 집에만 간 것이 아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애굽 땅 모든 집에 임했다.
둘째, 정의와 사랑을 함께 충족시킬 길은 대속이다. 모든 이스라엘 가정의 모든 맏아들은 식탁 위 접시에 담긴 어린양을 보며 "내가 죽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이 양이 대신 죽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정의 시행의 정수는 이웃 사랑이다. 가해자들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활동하는 악에서 해방되기를 바랄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만 악에 저항할 때도 그리스도인은 단지 복수할 목적으로 가해자를 겨냥해 상대나 상대의 평판을 해쳐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일일이 예를 들어 가며 명하신 대로, 신자는 악행에 대응할 때 격분과 상한 자존심과 복수심으로 해서는 안 된다.
한 그리스도인 작가는 이 본문을 이렇게 묵상했다. "아주 영적인 가르침이다. ... 자신을 올바른 태도로 대해야 한다. 피해를 입었을 때 즉각 발동하는 방어심리, 자아의 본성인 원한과 복수심을 (바르게) 처리해야 한다."

이번 장에서 배운 모든 내용이 요셉의 유명한 답변 속에 압축되어 있다.(창50:19~21) 그는 재차 용서한다고 말하되, 놀라우리만치 하나님 중심으로 용서를 표현했다. 형들에게 베푸는 수평적 용서의 근거를 철저하게 하나님의 수직적 용서에 둔 것이다. 용서하기가 힘들거든 당신도 이 방법대로 해 보라.
첫째, 그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말한다.(창50:19)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 계속해서 원한을 품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한다. 나는 심판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둘째, 그는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라고 말한다.(창50:20)
끝으로 그는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했다.(창50:21) 이것은 행동의 단계다.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죽기까지 하셔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반면 당신은 십자가 앞에서 요셉보다 더 든든한 확신을 얻는다.

인생을 완전히 망쳤더라도 당신에게 헤어날 길이 있다면 어떨까?
그 길은 바로 성경이 말하는 회개다. 회개는 과정이다. 시편 51편은 회개에 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세 가지를 그만하고, 두 가지를 새로 시작하고, 한 가지를 받아 들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회개, 책임 회피가 끝나는 데서 시작된다
-회개, 자기 연민이 끝나는 데서 시작된다
-회개, 자학이 끝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스도를 의히재 죄를 자백하고 버릴 때
    : 죄를 버린다는 것은 마음가짐과 실제 행동 모두 악한 행실을 완전히 끊는다는 뜻이다.
    : 이렇듯 회개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마음으로 죄를 미워하며 변화를 계획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를 받아들이라
    : 회개에는 기쁨이 따라와야 한다.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를 기뻐해야 한다. 기쁨 없는 회개는 절망을 낳는다.
-날마다 더 깊이, 더 새롭게

기독교적 용서는 선택 사항이 아니고 의지의 행위이며,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악이 당신의 대인 관계를 뒤틀어 놓으면 악이 이긴다. 당신이 계속 가해자를 해치려 하거나 조금이라도 분노를 품고 있으면, 그것이 관계를 망가뜨린다.
악이 당신의 자아상을 일그러뜨리면 악이 이긴다. 가해자의 잘못을 비디오처럼 상상 속에 재생한다면 당신은 그의 문제점과 자신의 훌륭함을 비교하는 것이다. 거기서 자기 연민과 독선이 싹튼다.

느낀 점 :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건너 뛰고 싶은 부분이 있다. 
내게 죄 지은 사람을 내가 용서하여 준 것 같이, 내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같은 죄를 회개한답시고 해놓고 또 짓고 있는, 어쩌면 죄를 미워하지 못하는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는 내게 이 부분만큼은 솔직히 건너뛰고 싶다.
그래서 용서의 정의를 비틀어서 생각해 볼 정도다. 남을 저주하고 욕하는 단계만 아니면 용서가 아니겠는가 스스로 위로하기도 한다.
외면하고 더 이상 보지 않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을 용서했다고 간주하려고 한다.
혹은 용서는 애초에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성령님이 내게 오셔서 감화 감동 받는 그날에 이루어지리라며, 내가 할 것이 아닌 것으로 치워 버리기도 했다.
내 인생에 큰 상처를 주곤 기쁘게 웃는 사람들과 다시금 화합이란 생각만해도 다시 또 당하는 거 아닌가부터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현재는 그저 나에게 큰 상처를 준 그들이 잘 되길 바라고 있다. 나와 상관 없이. 다시는 인생에서 마주치치 않은 상태에서 아주 잘되면 못난 사람한테 상처받은 것보다 잘난 사람에게 상처받은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으로 바라고 있다. 이게 내 인성의 한계라고 여기고 있다.
물론 진정한 성경적 용서가 아니라 내가 못하겠으니 어떻게든 그 정의를 비틀고 왜곡해서 내가 도달할 수 있는 기준으로 깍아 내리는 거라는 점도 머리로 알고는 있다.

"기독교적 용서는 선택 사항이 아니고 의지의 행위이며,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저 손놓으려고 하는 나에게 닿은 일침이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그저 내 마음 속 독기만을 몰아낸 것이 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용서는 결과적인 게 아니라 과정인 것이라며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솔직히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그저 나 없는 세상에서 잘되길 바할 수 있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과 화합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니 애초에 불가능한 이야기 같다. 물론 이 노력에 내 능력만 있다면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하나님에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그 은혜에 비하면 그들이 내게 준 상처를 별게 아닌 게 될 것이다. 결국 의식적인 노력과 함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내가 변하게 되길, 성령으로 감동 감화되어 내가 변하게 되길 기도하는 것이 함께 진행되어야 하는 것 같다.

"정의 시행의 정수는 이웃 사랑이다. 가해자들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활동하는 악에서 해방되기를 바랄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용서란 이런 것일 것이다. 내 마음에 칼을 쑤신 것 같은 사람일지라도 사랑해서 그가 악에서 해방되길 바라는 것.
아무리 내가 할 수 있는 용서의 수준으로 용서의 정의를 바꾼다해도 내 마음 속에 한 구석에 찔림이 계속 있었던 이유는 아마 이 사실을 나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나로써는 절대 불가능하지만,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에 대한 체감이 내 머리에서 내 마음으로 내려가 온 몸에 퍼질 때 쯤에는 나도 가능할 것이다.

삶에 적용할 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