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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ng`s Life ★

예기치 못한 기쁨 본문

Books

예기치 못한 기쁨

퐁~★ 2022. 6. 3. 17:19

일시 : 2022.06.01
제목 : 예기치 못한 기쁨
저자 : CS루이스
책 속 문구 : 
그 특징은 바로 충족되지 않는 갈망, 어떤 만족감보다 그 갈망 자체를 더 갈망하게 만드는 갈망이다. 나는 그것을 '기쁨Joy'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기쁨'은 전문적인 용어이므로 행복Happiness이나 쾌락Pleasure과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기쁨'(내가 말하는 의미의 기쁨)이 행복이나 쾌락과 공유하고 있는 특징은 단 한 가지, 그것을 한번 맛본 사람은 반드시 다시 맛보고 싶어한다는 것뿐이다. 그 한 가지를 제쳐놓고 오직 그 특질만 놓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기쁨'은 불행이나 슬픔의 특수한 형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종류의 경험이다. 그 '기쁨'을 한번 맛본 사람은 세상의 쾌락을 다 준다고해도 결코 바꾸려 들지 않을 것이라고 -만약 '기쁨'과 쾌락이 사람의 재량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믿는다. 그러나 쾌락은 우리 재량대로 얻을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기쁨'은 결코 우리 재량에 달린 것이 아니다.

눈앞에 닥친 공포에 비해 집이나 방학이나 천국은 초라할 정도로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가 크게 착각한 것이 아니라면 그 안에는 숭배와 아주 흡사한 무언가, 어떤 대상을 향한 사심 없는 자기 포기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는데, 그 자기 포기는 강제적인 요구사항이 아니라 그 대상의 존재 자체로 인해 위험부담 없이 감행하게 되는 자기 포기였다.

모든 '기쁨'은 무언가를 상기시킨다. '기쁨'은 소유물이 아니라 왜 전에 있었던 무언가, 저 멀리에 있는 무언가, 아직 '이르지 않은' 무언가를 바라는 갈망이다.

평생에 자신과 정말 비슷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는 것 같다.

"인간은 손쉽게 계몽될 수 있는데도 무지를 더 좋아한다"

나는 이제 그리스어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언어를 배울 때 건너야 할 루비콘 강이다.

예술 작품이든 자연이든 제대로 감상하는 첫걸음은 그 대상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다 .입을 다물라. 눈과 귀를 열라. 눈앞에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어야 했는데 없는 것은 무엇이냐' 라든지 '여기 있어야 했는데 저기 있는 것은 무엇이냐' 따위는 생각도 하지 말라. 꼭 그런 생각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해도 나중에 하면 그만이다(무엇이든 좋은 것을 올바로 훈련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올바로 훈련하는 일의 예표가 되며, 달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언제든지 후자의 훈련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과목이든 전에 배운 것들을 활용할 수 있는 학교이다).

그러나 나는 참 하나님을 림몬만큼도 믿지 않으면서도 성전에서 절하고 있었던 수많은 죄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내 기억에서 두려움의 요소는 엄청나게 부풀린 반면 그와 연관된 다른 많은 요소들은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숙사에서 경험했던 그 보름달 휘황하던 밤은 다시 겪지 않기를 바랐다.
독자들도 기억하다시피 나는 적극적인 요구보다 소극적인 요구가 강한 사람이어서, 행복을 성취하기보다는 고통을 피하는 데 더 급급했고 내가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분노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한정된 책임만 질 것을 요구하는 유물론자들의 세계는 나 같은 겁쟁이에게 한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유물론의 세계에서는 철저하게 무한한 재앙이 나를 덮칠 수 없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기 때문이었다. 또 유한한 재앙이 올 때에도 그것이 내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 때에는 언제든지 자살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기독교의 세계가 주는 공포는 거기에 출구라고 쓰인 문이 없다는 데 있었다.

나는 경험이야말로 정직한 것이기 때문에 경험을 좋아한다. 사람은 얼마든지 잘못된 길로 접어들 수 있다. 그러나 눈만 크게 뜨고 있으면 그리 멀리 가지 않아 경고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을 속일 수 있지만, 경험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사람이 공평하게 시험하기만 하면, 우주의 어느 부분에서든 참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에 뒤따라오는 현상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우주 전체가 결국은 정신적인 것임을, 그리고 우리의 논리란 곧 우주적인 로고스에 동참하는 것임을 인정해야 했다.

우리 내부의 활동에 대한 향유와 관조는 양립될 수 없다. 우리는 희망하는 동시에 희망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희망이란 희망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인데, 희망 그 자체로 시선을 돌려 버리면(이를테면) 그 대상을 바라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가지 행위가 아주 빠른 속도로 교대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별개의 행위이며 양립될 수 없는 행위이다.
이것은 알렉산더의 분석에서 나온 논리적인 결과일 뿐 아니라, 매일 매시간의 경험을 통해 입증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분노나 정욕을 무장 해제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모욕받은 사건이나 상대방 여자에게서 관심을 돌려 자기 감정 그 자체를 검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쾌락을 망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기의 만족감 그 자체를 검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쁨' 그 자체를 갈망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잘못이었음을(그것은 놀랍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인식했다. '기쁨' 그 자체는 단지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사건일 뿐 아무 가치도 없는 것임이 드러났다. 모든 가치는 '기쁨'이 갈망하는 대상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나의 마음상태나 몸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누가 내 갈망의 대상이냐?"라고 묻는 대신, "무엇이 내 갈망의 대상이냐?"라고만 묻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질문은 나를 경외의 땅으로 밀어넣었다. 나는 절대 고독 속에는 자아의 바깥으로 나가는 길, 즉 그 무언가와의 교류가 있는데, 그 무언가는 감각의 대상이나 우리의 생물학적 필요, 사회학적 필요, 상상의 산물, 마음상태와 동일시되기를 거부하면서, 자신이 순전히 객관적인 존재임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무언가는 몸보다 훨씬 더 객관적인 존재이다. 왜냐하면 몸처럼 감각의 옷을 입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각의 옷을 입지 않은 '타자', 형상도 없고(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오만 가지 형상을 만들어 내서 절을 하지만) 무엇으로 규정되지도 않는 미지의 존재, 갈망의 대상이었다.

 

우리 유한한 인간은 과학의 관점에서 보나 인간이 흔히 서로를 보는 관점에서 보나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자'의 껍데기이다.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면(이것은 별 의미가 없는 말이지만), 이를테면 완전한 실체인 절대자에게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된다.

 

나는 이제 진심으로 믿는 바, '기독교라는 요소만 뺀다면' 기독교야말로 상당히 분별력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절반은 비현실적이며 유한한 우리 인간의 영혼이 해야 할 일은 '그 영과 위치는 다르지만 질적으로는 같은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즉 특정 시공간과 상황에 매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처럼 생각하고 그 영처럼 의지를 행사함으로써 그 영에 대한 의식을 늘려 나가는 일'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영이 인간의 영혼과 세상에 자신을 투사한 바로 그 행위로 인해 인간의 영혼은 서로 다른 경쟁적 이해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 결과 이기심의 유혹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공간 안에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광학적 시야를 신뢰하지 않는 것처럼, 개별적인 자아에 따라 달라지는 광학적 시야를 신뢰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각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 행복을 남의 행복보다 중시하는 것은 가까이 있어서 커 보이는 전신주가 실제로도 크다고 여기는 태도나 다름없다. 우리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회복해서 그에 맞게 행동하려면, 매일 매시간 우리의 참된 본질을 기억하면서 그 영(어쨌든지 간에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한 우리 존재의 뿌리는 여전히 그 '영'에게 있으므로) 안으로 되올라가든지 되돌아가야 했다.

 

 

느낀 점 : 

나는 아직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나는 내 행동에 대해 기쁨이 원천이 되어 움직이기보다 두려움에 움직이고 있다. 아직 죄의 자녀 노릇 중이다.
삶에서 기쁨이 아닌 두려움에 잠식되어 나를 옭아메며 사는 삶은 진정한 기쁨되신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나는 그냥 그리스인 지망생 정도다. 이 책은 작가 본인이 진정한 기쁨을 만나게 된 과정을 나누고 있다.

작가 같이 위대한 사람의 솔직한 어릴 때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것은 몇몇 부분은 내 어린 시절의 허세와 치기가 가득한 모습과도 비슷한 점이 있구나였다. 역시 전두엽이 덜 자란 사춘기 소년들은 다들 비슷한 생각들을 하는 구나 싶으니 안도감도 좀 되었으나 나는 작가처럼 치열하게 붙잡고 고민하지 않고 눈 앞의 일에만 집중하며 살다보니 이렇게 어중이 떠중이처럼 살고 있다.

나는 모태 신앙이라서 한 번도 그 분의 존재를 부정하며 살아본 적은 없다. 다만 평생을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살아왔다. 그래서 가끔은 회심을 하신 분들, 터닝 포인트를 갖고 있는 분들은 과거의 어느 순간이라도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부럽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야 지금의 고통이 과거 하나님을 만난 경험으로 인해 기쁨으로 변화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면 모태신앙이든 아니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나님을 정말 알고 있는 지가 중요한 부분 같다. 정말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런 일들을 하셨고 또 내 삶 속에서 그동안 꾸준히 이런 일들을 베풀어 와 주셨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알고 있는 지 말이다. 이 점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작가는 어린 날에 치열하게 고민해서 결국 하나님을 만났다. 물론 그의 표현에 의하면 그가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로잡아 주신 것이다. 

나는 이런 일들이 내게 필요하다는 깨달음조차 얼마되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간 발버둥친 결과로는 내게 주어진 이 삶이 오직 고통을 감내만 하다가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기 위해 이를 악물로 살라고 주신 삶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진정한 기쁨을 만난다면, 주님께 내가 온전히 사로잡힌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내 삶의 모든 우선순위가 뒤집어질 것이다. 내가 온전히 주님께 사로잡힐 그날을 기대해 본다.

 

삶에 적용할 점 :

나도 주님께 온전히 사로잡히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