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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총새에 불이 붙듯 본문

Books

물총새에 불이 붙듯

퐁~★ 2022. 8. 2. 15:26

일시 : 2022.08.02
제목 : 물총새에 불이 붙듯
저자 : 유진 피터슨
책 속 문구 : 
물총새에 불이 붙고, 잠자리 날개가 빛과 하나 되듯,
우물 안으로 굴러든 돌이 울리고,
켜진 현들이 저마다 말하고, 흔들리는 종이
자신의 소리를 널리 퍼뜨리듯,
모든 피조물은 한 가지 같은 일을 한다.
각자 내면에 거주하는 제 존재를 밖으로 내보낸다.
자기 스스로를 발현한다. 그것이 '나'라고 명시한다.
'내가 하는 것이 나이며, 그 때문에 내가 왔다'고 외친다.

더 있다. 의로우신 그분은 의를 행하고,
은혜도 지키시니 그 모든 행위가 은혜롭다.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시는 그분,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수만 곳을 다니시며,
아름답게 노니시기 때문이다. 자기 눈이 아닌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아버지에게 아름답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인다움에 일치하고자 하는 평생의 노력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신5:12)
그 핵심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이 해오신 일과 하시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라.

우정이란 두 사람이 서로 관계가 있고 중요한 관심사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기록되고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을 듣는 회중 개인과 선조의 경험을 가져다가 바로 지금 현 순간의 사건으로 그 말과 경험을 재생시킵니다.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로 바꿉니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듣는 방법입니다. 기도는 주의를 집중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합니다" (행 17:28)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 곧 '성령'에 의해 건강하고 성숙하게 형성되는 삶입니다.

저는 모든 실재에 내재하는 거룩의 아름다움에 대한 증인으로 우리가 부름받았음을 재차 확언하고 싶습니다. (우리를 포함하는) 이 남자와 여자들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흠모하고 믿으며 구체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말과 이미지, 소리와 질감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소와 사람과 분리된 기독교 복음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상이나 계획이나 비전이 아닙니다. 복음은 창조와 성육신에서만, 사물과 사람 안에서만 작용합니다. 육신을 부인하는 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행동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기도는 기적의 기어와 도르래를 작동시키는 기술을 개발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행동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입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라 걷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이러한 세 가지 거부해야 할 삶의 방식은 '걷다', '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앉다'로 내려옵니다. 능동에서 수동으로, 역동에서 정체, 무력한 부동, 내적 갇힘의 상태로 이동합니다. 단테가 묘사한 지옥의 가장 낮은 주민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언 상태로 얼음장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악인들'에서 '죄인들' 그리고 '오만한 자들'로의 움직임은, 행실이 나쁜 사람에서 습관적으로 잘못을 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자기 방식이 굳어져 다른 모든 사람을 경멸하는 사람으로의 움직임입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14:6)
예수님은 그 길이 어떻게 우리 삶에 작용하는지 자신의 삶으로, 성육신으로, 현존으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 스스로 알아내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길은 어떤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 걷는 길만이 아니라, 그 길에서 우리가 사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이 구원 이야기에 우리로 하여금 지금 참여하게 하려고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성경에 아가서가 있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을 하며 살기 위해서 육체적, 감정적, 정신적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제시한 쉬운 답들은 하나님 자신을 대체하는 잔인한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말, 그러한 대답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도 그런 말을 하고, 때로는 기록도 합니다. 교육, 기술, 상담, 도덕 프로그램 그리고 영적 기법들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욥은, 해결책은 또 하나의 답변, 또 하나의 책, 또 하나의 상담가, 또 하나의 설교, 또 하나의 연설, 또 하나의 과학적 돌파구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질문을 듣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 질문은 확고하게 우리 앞에 있는 것, 우리가 통제하거나 조작할 수 없는 것에 주목하게 합니다. 답변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불행한 일이 닥칠 때, 의심이 우리의 내면을 갉아먹을 때, 불안이 엄습할 때, 그때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물론 욥은 하나님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고,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우리 주변에 그리고 우리 안에 그토록 많은 살아 있는 아룸다운 것들, 생명을 주는 것들,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지만 우리가 받아서 즐길 수 있는 것들에 주목하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야기에 삶을 걸도록 자신의 추종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이야기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존재는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물려받고 겪고 변화시켜야 하는 서사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은 단지 미래의 삶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시작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비인격적으로 행하지 않으십니다. 비인격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적을 기대하지 말고, 답을 달라고 아우성치지 마십시오. 육신이 되신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여러분에게 주시는 그분의 희생제사에 집중하십시오.

모든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는 공유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이야기는 다릅니다. 그러나 일종의 계시처럼, 개인의 진실이 드러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이 타당하고 건강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의 이야기가 비정상적인 심리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야기를 해보십시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리를 구별하시고, 개인적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통된 플롯을 알아보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몸과 감정과 생각의 특징들을 존중하시고 그것을 세심하게 사용하셔서, 각자의 이야기를 아주 새롭고 독창적이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혹은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날씨도 어쩔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도 어쩔 수 없습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이나 우리의 몸이나 정부에 맞춰 가며 사는 수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삶의 중심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한 행위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 사람이 완전히 교유한 개인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삶의 모험을 감수하며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럼으로써 삶의 활력을 얻고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우리는 이 세 가지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위의 영역을 열망하고", "이 땅에 속하는 부분들을 다 죽이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으십시오"(골3:1,5,12). 이것이 바로 우리 이웃이 우리의 행동을 통해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영역입니다.

그 말이 설교되고 노래되고 가르쳐지고 기도되기를, 살아지기를 원한다.

모든 것에는 우리가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맛볼 수 있는 것 이상의 무엇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무엇에서 가장 큰 부분은 삼위일체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입니다. 복음은 하늘과 땅을 잇는 일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땅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과 나라와 뜻이 하늘에서와 같아지기를 인내하며 끈질기게 염원하는 기도가 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라고 흔히 이해하던 부활이 이제는 완전히 바뀌어서 "산 자들의 땅"(시116:9)에서 사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부족함과 실패를 사용하셔서 우리가 은혜와 사랑과 순종을 경험하는 삶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지도력이 아니라 '추종력'이고, 더 커지는 것이 아니라 더 작아지는 것입니다.

느낀 점 :

지옥이 아닌 천국가기 위한 신앙으로써의 기독 신앙은 죽어서 영원이 즐겁기 위해 삶을 포기하라는 것 같다.
성경을 보면 살아계신 자들의 하나님이요, 하나님을 알면 기쁨이 넘치다고 했는데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삶이 기쁠 수가 있을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죽어서 천국에서 맞이할 기쁨에 극한 고통 속에서도 기쁨이 느껴진다는 것은 다시 말해 현재의 삶은 스쳐지나갈 뿐 오직 어서 죽어서 천국 갈 그날을 바라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싶다. 그렇다면 빨리 죽는 게 이득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영은 좋은 것이고 육은 나쁜 게 되는데, 이는 성경에 나온 말씀들보다는 플라톤의 이원론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더불어 이런 상황 속에서 현재의 삶 자체에서는 기쁨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삶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살아가야 하는가?
이 책을 읽는 시간은 그리스도인에게 지금의 삶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 볼 수 있던 시간이었다.

"영원한 생명은 단지 미래의 삶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시작되는 삶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연습을 통해서 죽음 이후 부활해서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잘 지낼 수 있게 연습하는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말이 설교되고 노래되고 가르쳐지고 기도되기를, 살아지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서 살아 있을 수 있게 우리는 말씀을 몸으로 나타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죽음 이후의 삶이라고 흔히 이해하던 부활이 이제는 완전히 바뀌어서 "산 자들의 땅"(시116:9)에서 사는 삶이 되었습니다."
오직 죽음 이후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지금 현재 올바른 하나님의 자녀로써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삶은 결별해야만 하는 내 육신을 이기기 위한 시간도 아니고, 천국의 영원한 기쁨을 위한 감내만을 위한 시간도 아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을 수 있도록 삶으로 말씀을 드러내는 삶이어야 하고,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맺는 삶이다. 온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다면, 삶에서 나타난 고통 속에서도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위로와 기쁨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죽어서 천국가기 위한 신앙이 아닌 이 땅에서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음으로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나머지는 자연히 따라오지 않을까 싶다. 세상 어떤 문제가 닥친다 해도 온 세상을 지으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데 두려움이 있을 수 없으며 그 삶은 즐거움이 가득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되면 삶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런 삶을 살게 되면 어떤 교회에서는 목표 달성 수치를 만들어 압박하는 전도도 당연히 이루어지게 된다.
삶의 목표를, 살아가는 이유를 천국에서 하나님으로 재조정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삶에 적용할 점 :

내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나?....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