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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인생 질문

퐁~★ 2020. 8. 20. 09:09

일시 : 2020.08.19

제목 : 팀 켈러의 인생 질문

저자 : 팀 켈러

책 속 문구 :


"기독교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는가"

 

사물의 목적(telos)을 모르고는 그것의 좋고 나쁨을 결코 분간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나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인간이 지어진 목적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는다면 당신은 다시는 인간의 선악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지어진 목적이 없다고 믿으면서 당신이 특정인에 대해 "저 사람은 바르게 살지 않는다. 행실이 틀렸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자가당착이나 표리부동이다.


"기득층과 소외층이 있는 현 세상,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무엇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는가? 무엇으로 삶의 만족을 얻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어떤 외부 조건도 내면이 깊은 갈증을 채워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중략)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그것을 주어 네 안에 심을 수 있어. 외부 환경이나 사건과 무관하게 네 존재의 응어리 속에 불가해한 절대적 만족을 줄 수 있어"라고 말씀하신다.

 

신이 존재한다면 당신의 모든 것은 신에게서 왔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당신은 훌륭한 도덕 생활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하나님께 드릴 의무가 있다. 그분은 마땅히 당신 삶의 중심이 되셔야 한다.


"신이신 예수가 인간의 슬픔을 알겠는가"

 

항상 상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줄 만큼 기질이나 인내심이나 통찰력을 다 갖춘 사람은 인간 중에 아무도 없다.


"답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진짜 답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마음의 깊은 만족과 황홀한 기쁨을 미래에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주기 위해 오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력 구원의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해 오신 게 아니라 친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죽기 위해 오셨다.


"정말 부활이 가능한가"

 

우리의 망가진 도덕적 영적 감수성의 상태로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요컨대 믿음은 외부의 개입이나 도움이 없이는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초자역적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믿음이란 사실이 아닌 것을 의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증거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한껏 끌어올려 준다.

 

진정한 믿음은 언제나 각 개인의 것이다. 당신이 만일 예수께서 인류 전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죽으셨다고만 믿고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고는 믿지 않는다면 이는 믿음으로 그분을 붙드는 게 아니다. 당신을 이름으로 불러 주시는 그분의 음성을 아직 듣지 못한 것이다.


"요즘 세상에 사탄의 존재는 너무 터무니없지 않는가"

 

첫째, 적은 누구인가?

 

성경이 말하는 악은 자연과 초자연, 우리의 안과 밖, 개인과 사회 제도 등에 공존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악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악의 진상을 규명할 수조차 없다.

 

기독교에 따르면 세상에는 잘못된 개별적 선택들의 누적 효과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악이 존재하며, 그 악의 일부는 실존하는 사탄의 세력 탓이다.

 

둘째, 전선은 어디인가?

 

하나님이 방금 막 예수님께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확언하셨는데도 사탄은 즉각 그 부분을 치고 들어온다. 예수님께 말하기를 하나님이 그분을 사랑하시고 능력을 주신다는 증거를 받아내라고 부추긴 셈이다. 그러나 의심이 없는 한 상대에게 시범과 확답과 증거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사탄의 군사적 주목적은 그것이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전폭적 수용과 무조건적 부성애에 대한 확신을 잃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그 주요 전선에서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공격해 올 것인가?

우선 그는 당신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구주이심을 믿지 못하게 하려 한다. (중략)

자신이 사랑받는 자녀로 입양되었음을 원칙적으로 아는 경우에는 사탄이 우리를 도덕적 행위와 선과 노력해 기초한 자아상으로 되돌아가게 하려 한다.

 

셋째, 이 싸움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방어는 무엇인가?

 

그러나 대체로 사탄은 눈에 보이는 살점에 이빨 자국을 내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거짓을 심어 공격한다.

 

최상의 방어는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닌 진리를 되새기는 것이다.

 

마음에서 사고와 감정과 행동이 흘러나온다. 마음이 신뢰하는 것을 사고는 정당화하고 감정은 갈망하고 의지는 수행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머릿속과 마음속의 해박한 성경 지식 없이는 세상의 악한 세력에 감히 맞서지 않으셨다.

 

그러나 사탄의 공격을 만날 때 -유혹 때문에 죄를 짓거나 낙심하거나 그냥 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성경의 말씀을 우리의 중심에 두고 굳게 붙들어야 한다.

 

이 영적 전쟁을 위한 자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본문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다. (중략) 그분은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겪어 보셨기에 곁에서 우리를 도와 안팎의 악의 현실에 직면하여 싸우도록 도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속에서 사탄의 거짓말과 싸우고 세상에서 사탄의 활동과 싸울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말씀의 주님께도 의지해야 한다.


"교양 있고 괜찮은 사람인 나에게 굳이 대언자가 필요한가"

 

하나님이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했다.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면 그분은 의롭지가 못하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아버지여, 내 백성이 죄를 범하였으니 법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오나 내가 그 죗값을 치렀나이다. 여기 죽음의 흔적인 내 피를 보소서. 십자가에서 내가 죄의 형벌을 다 당했사오니 같은 죄를 두 번 벌하심은 의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위하여 자비를 구하는 게 아니라 정의를 구하옵니다."

 

첫 대언자는 하나님께 당신을 대변하시지만 두번째 대언자는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고별 설교 내내 예수께서 밝히셨듯이, 성령의 직무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셨으나 사도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모든 일을 "너희에게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심으로써 구원 사역에 대한 그분의 모든 가르침을 사도들에게 깨우쳐 주신다(요14:26).


"왜 신이 죽어야만 했는가"

 

예수님은 수동적으로만 아니라 능동적으로도 우리 대신 하나님의 율법을 충족시키셨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몫의 형벌을 당하시고 우리는 그분 몫의 상을 하나님께 받는다.

 

그러나 동산에 들어서면서 심히 놀라신 것으로 보아 자신이 곧 당하실 일을 실제 체험적으로 아신 때는 바로 지금이다.

 

만일 예수님이 내 몫의 죽음만을 당하셨다면, 내가 아버지께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온전히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하는 일이 나의 훌륭한 도덕적 삶에 달려 있다고 느껴지는 게 당연할 것이다. 죄는 용서받았지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좋은 평가는 전적으로 내가 얼마나 바르게 사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몫의 죽음만을 당하신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았어야 할 삶까지도 사셨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의 죽음으로 인하여 죄 사함만 받는 게 아니라 순종의 혜택까지 입는다.

 

깊은 고뇌 중에도 그분은 용케 무언가를 찾아내 제자들을 인정해 주신다. 그날 밤 제자들이 잘못한 행동이 수두룩한데도 그분은 한두 가지 옳은 점을 찾아내 지목하신다.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우주 최악의 일까지 다 감당하시고도 그 사랑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런데 그 무엇으로도 당신을 향한 그분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


"승천하지 말고 우리 곁에 계속 계시면 안 되었는가"

 

첫째, 승천이 신학적으로 무엇이며 둘째,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알아보려 한다. 우선 승천이란 무엇인가? 승천은 단지 예수님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일이 아니라 새로운 왕위에 올라 우리와 더불어 온 세상과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서신 사건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첫째,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누구나 사랑으로 소통하며 교제할 수 있는 대상이다. (중략)

둘째,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완전히 인격적이실 뿐 아니라 권능자시다. (중략)

끝으로, 승천하신 그리스도 덕분에 당신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용서하시고 받아 주시고 기뻐하심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신약에 따르면 예수님의 승천은 그분이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정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대변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을 보실 때 승천하신 예수님을 보시고, 당신의 말을 들으실 때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신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따르는 대가가 필요한가"

(책 속 문구 정리)

 

그녀는 왜 위대해졌는가? 하나님과 그분의 메시지 앞에 보인 반응 때문이다.

첫째, 마리아는 생각했다. 논리력을 구사했다.

-증거를 따져 보고 주장의 자체적 일관성을 저울질하여 사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둘째, 마리아는 의심을 솔직히 표현했다.

-부정직한 의심은 교만하고도 비겁하며 경멸과 게으름의 표출이다.

-반면에 정직한 의심은 겸손하다. 그냥 벽을 쌓는 게 아니라 질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셋째, 마리아는 완전히 순복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따르는 대가를 따져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제자도의 '비용을 계산'하라고 말씀하신다(눅 14:25~33). 그러나 계산하는 게 아니라 협상하려는 이들이 많아서 탈이다. 이것저것 포기할 의사는 있으나 무엇을 포기할지를 결정한 권리만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를 때 가장 어려운 일은 항복이다."

-"주님, 주님이 제게 무엇을 요구하실지 다는 모르지만 좋든 싫든 주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주님이 제 삶에 허락하시는 일이라면 다 참고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니 요셉과 마리아가 "우리는 부르심에 응하여 이 아이를 받아들입니다. 무슨 일이 뒤따르든 감수하겠습니다"라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마1:23)을 말 그대로 둘 사이에 모시려면 무엇이 필요했을까? 그 분과 함께 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본문이 보여 주는 답은 용기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꺼이 그분의 뜻을 행하려는 자세다.

마지막으로 넷째, 당신에게 공동체가 필요하다.

 

느낀 점 :

살면서 다양한 문제가 생기고 궁금함이 생기는데 이 중에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아마도 나는 누구인가 일것 같다. 내가 선택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삶이라는 것을 살며 고통과 기쁨을 얻으며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언젠가 죽는다고는 한다. 이런 내게 가장 근원적인 질문은 내 존재에 대한 궁금함일 것이다. 내 존재의 목적, 존재의 이유 등을 알아야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지금 내 눈 앞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인간의 존재론에서 시작한다. 인간 삶의 목적부터 시작해서 기독교의 중요한 10가지 핵심 질문을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는가"
"기득층과 소외층이 있는 현 세상,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신이신 예수가 인간의 슬픔을 알겠는가"
"답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진짜 답인가"
"정말 부활이 가능한가"
"요즘 세상에 사탄의 존재는 너무 터무니없지 않는가"
"교양 있고 괜찮은 사람인 나에게 굳이 대언자가 필요한가"
"왜 신이 죽어야만 했는가"
"승천하지 말고 우리 곁에 계속 계시면 안 되었는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따르는 대가가 필요한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10가지 질문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심이 증명되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 밝혀진 뒤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질문은 그럼 기독교는 무엇인가일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기독교 교리 전반에 걸친 질문과 이에 대한 답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질문과 이에 대한 답은 우리에게 행동을 요구한다. 납득했다면 완전히 순복하라는 것이다. 이리저리 재보고 계산해보고 따져보고를 전부 허락하신다. 그저 믿으라는 것이 아닌 충분히 생각을 해보라고 말씀하셨다. 단, 모든 것이 사실이라 판명되고 믿어지면 온전히 순복하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해도 마음과 행동이 변하지 않는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진실인지 아닌지 논쟁하는 데 관심이 있지 이것을 믿고 따르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이 부분은 내게 있어서도 많은 생각과 반성을 하게 된 부분이다. 나는 내 믿음대로 행동하고 사는 가? 하나님 계심을 안다고 하는 데 정말 그렇게 믿고 행동하며 사는 가?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의미가 없다. 머리로 납득하게 됐으면 몸도 따라가야만 한다. 다시 한번 내 삶과 행동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되었다.

 

삶에 적용할 점 :

머리로 납득한 대로 행동하고 살자. 납득했으면 온전히 순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