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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너무 몰랐다

퐁~★ 2019. 5. 22. 12:43

일시 : 2019.05.27

제목 : 우린 너무 몰랐다

저자 : 도올 김용옥

책 속 문구 :

"치작"이란 원래 "나이에 딸 작위를 준다"는 뜻이다. 이것은 원래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봉건제를 폐하고 새롭게 군현제를 만들어갈 때, 새로운 보편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하여 과거의 군공에 의존한 작제를, 동네마다 나이순에 따라 작위를 주는 독특한 콘트롤 시스템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이것은 허작이기는 하지만 전국의 인민에게 질서감과 소속감과 의무감, 충성심을 불어넣는 훌륭한 제도로서 존속되었다.

[태조실록]은 참으로 비굴한 실록이다. 명태조 주원장은 그 당시 조선에 대하여 뻗대거나 조선을 침공할 수 있는 힘이나 여유가 있지 않았다. 주원장도 개국초기에 공신세력이나 반발세력을 압살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성계가 명에 대해 하는 짓거리들은 가소롭기 그지없다. 무조건, 아무 이유 없이, 명의 권세와 허명을 떠받드는 것이다. 이러한 사대의 굴종은 결국 조선민족이 고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 독자적으로 지켜온 제국의 권위와 윤리를 총체적으로 거부하고 제후국으로서 조선의 안녕을 도모하려는 구생의 소로요, 비로요, 장로였다. 이성계도당의 이러한 구차투생의 윤리나 행태나 전략은 결국 이씨조선 지배계급의 생리가 되어, 양녕대군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이승만에게까지 그대로 계승된다.

해방의 아이러니는 우선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해방"이 우리 민족에게 "독립"을 선물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해방 그 자체가 불행하게도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량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수행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셋째로, 해방은 갑작스러운 "권력의 공백"을 초래하였고, 이 공백을 메워가는 세력들의 새로운 전쟁을 야기시켰다. 넷째로, 해방은 이념적인 주체가 확실치 않았기 때문에, 우리 민족에게 이념의 갈등과 혼란을 선물했다.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내가 말하지 않겠으나 상해에서 이승만의 여러 가지 행태를 분석하고 분개한 단재 신채호의 일갈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이는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 이놈은 아직 우리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단재는 이승만의 외교노선이 아무런 진실성이 없는 방편주의에 불과한 장난임을 깨닫고 임정 자체를 포기하고 북경으로 고고하게 떠나가고 만다. 이승만은 실제로 독립이 아닌 "위임통치"를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는 9월 4일, 오키나와를 출발하기 전에 24군단 장교들에게 이와 같이 지시한다: "한국은 미국의 적이다. 그러므로 항복의 조례와 규정의 적용을 받는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지배세력이 정부의 형태로 군림한다는 사실을 당연히 모든 토착세력들, 주체적 세력들은 반대했지만 이 사실을 반기는 세력이 있었다. 그동안 숨죽이고 끽소리 못하며 "좇됐다"고 생각한 세력들, 원래 세력 있었고, 많이 배웠고, 영어를 유창하게 하면서, 기독교를 신봉하고, 반공사사에 투철했던 사람들, 그리고 열렬히 황국신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살았던 그 사람들에게는 "미군의 입성"은 암흑 속에 빛이었고 부활의 희망이었다. 이들은 9월 8일, 오늘날 우리나라 정당들의 궁극적 뿌리인 "한민당"(한국민주당의 약칭)을 창당하고, 인천 앞바다에 하지의 배가 떠있을 때부터 이미 모든 접촉을 시도했다. 이들이 하지와 그의 부하들에게 철저히 주입시킨 것은 "인민위원회"는 빨갱이들의 조직이며, 이미 이들에 의하여 조선 전체가 장악되었으며, 이들의 분쇄가 없이는 미군정의 통치는 불가능하다는 적대논리였다.

한국은 미국의 지배를 받는 새로운 형태의 속국이 된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미국제국주의의 지배로 외형적 변화만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미국제국주의는 일본제국주의의 조선통치체제를 그대로 계승하려 했다.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에서 탄핵을 당해 대통령의 직위를 박탈당했지만, 그는 상해임정의 정통성을 거부하고 마음대로 독립운동자금을 독식하며 여전히 한성정보의 대통령으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남한의 인민위원회 사람들의 좌절감은 분노의 노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지방의 일본경찰력을 접수한 인민위원회 사람들은 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무력 앞에 그것은 코풀이개 휴지만도 못한 것이었다. 미군정이 들어서고 여기저기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모든 경찰서에 그들이 축출했던 일제경찰들이 다시 고스란히 복귀하여 그들에게 미제 무기를 들이대고 있다는 사실을 인민위원회의 동지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민위원회의 저항은 완강했다.

무기를 포기하지 않은 채 산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이들을 우리는 그냥 막연하게 "빨치산"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빨치산은 산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보통사람위원회" 사람들이었다.

"신탁통치안"은 오히려 미국이 제시한 것이다. 소련은 본시 조선에 대하여 "직접통치"라는 발상을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토지개혁이나 계급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적 유대감을 더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따위 신탁통치라는 발상에 관심이 없었다. 소련은 신탁에 관한 미국의 제안에 대해 신탁이 빨리 종결될수록 좋으며, 최장 5년을 넘어서는 아니 된다는 한도를 제시했다. 그러니까 [동아일보]의 보도는 외신의 오보에 의거했다고는 하나(외신 그 자체가 불확실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실상을 완전히 반대로 전환시켜 국민들에게 반소, 반공의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에서 선동적으로 1면에 등장시킨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동아일보가 한민당의 기관지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19세기 우리나라 선교의 주류를 형성한 조직이 파리외방선교회인데, 이 선교회는 동방문화에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제수이트와는 달리, 지극히 고답적이고 자기들이 생각하는 종교적 가치 이외의 모든 문화를 야만과 죄악과 저주로 간주하는 극도의 배타적 선교정책을 견지하였고, 또 프랑스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제국주의적 침량의 전초기지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프랑스함대와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참형당한(기해박해) 3인의 외국신부, 샤스땅, 앵베르 주교, 삐에르 모방(모방은 최초로 조선땅을 밟은 외방선교회 신부로서 김대건을 발탁하여 마카오로 유학시켰다)도 다 파리외방선교회(MEP) 신부들이었고, 명동성당을 짓는 데 공헌한 뮈텔 주교도 파리외방선교회 사람이다. 해주지역의 포교에 공이 큰 안중근이 뮈텔을 찾아가 황해도 고향에 대학교건립을 요청하자,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고 개회되면 신앙심이 떨어진다는 주장을 서슴치 않고 하면서 거절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외국신부놈들 믿을 놈들 못 된다. 조선인의 각성에 근본적인 관심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독립투쟁에 전념키로 한 안중근의 사상역정은 본인의 명료한 진술로서 남아있다. 후에 뮈텔 주교는 안중근을 일방적으로 출교시켰으며, 로마가톨릭과의 관계를 전면부정하고 안중근의 의거를 살인행위로 단죄했다. 뮈텔은 한국인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우월의식이 있었으며 한국인 성직자마저 동역자로 인식하지 않았다(한국인 원로신부님 최석우의 증언). 신축제주민중의거 또한 바로 뮈텔 주교 수하의 신부들의 몰지각, 토착문화경멸, 사람비하, 횡포에서 비롯된 것이다. 빌헤름 홍신부도 황해도 교인들에게 몽둥이 폭력을 일삼았다는 이야기는 [안응칠 역사]에 명료하게 기술되어 있다.

일본은 이미 19세기 말엽 "자유민권운동"이 발발하여 민주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각종의 민권의식이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제주도민은 오오사카 지역에서 살면서 이러한 선진문명의 훈도를 받았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 정국에 있어서 가장 선진적 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가장 단합된 조직적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역사적, 지정학적 조건을 갖춘 민중이 바로 제주민중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쪽 대륙에서는 제주도를 외딴 섬으로, 문화의식이 낮은 곳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제주도는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도 유족하며, 교육적으로도 선진문물을 흡수하여 깨어 있었고, 국제적 감각이 있는 문화를 유지했다.

사람을 죽이는 사태에 이르렀는데도 공권력이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시위주동자들을 검거하는 일에 주력하자, 제주도는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발로 총파업에 돌입한다. 단합 잘하기로 유명한 제주도민들이 사태를 유야무야 방관할 리가 없다. 도청, 관공서서는 물론, 은행, 회사, 학교, 운수업체(제주도는 철도가 없었다), 통신기관 등 도내 156개 단체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현직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이승만은 이 서북청년단의 인력을 남한사회의 반공화를 위한 프론티어로 활용했다. 며칠간의 훈련만 받으면 곧바로 경찰과 군인의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겉으로 보면, 버젓한 군인이고 경찰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월급이 지급되질 않았다. 마음대로 약탈하고 겁탈하고 죽이고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서북청년단에 관한 한, 아무런 룰이 없었다. 이 서북청년단의 아버지가 바로 조병옥이고, 장택상이었다. 빨갱이라면 전후 좌우맥략을 무시하고 때려잡는 사람들, 이들은 대체로 반공의 투사들이었고, 열렬한 예수쟁이였고, 인간평등관을 거부하는 서북의 지주자제들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기독교인 = 반공투사 = 반북반통일 = 우익승미"의 정서가 우리사회의 저류를 흐르고 있는 현실은, 소수정객의 탐욕에서 비롯된 그릇된 역사인식이 보정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8년 4월 3일 전까지 제주도에서는 서청경찰 760명이 투입되었고, 조선경비대 옷을 입은 서청 1,700명이 추가 투입된다. 이들의 만행은 너무도 끔찍했다. 47년 1년 동안에 2,500명의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검속되었고, 1948년 3월 6일 조천지서에서는 어린 조천중학생 김용철 군이,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서 청년 양은하가 고문치사 당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4.19가 마산상고 김주열 군의 주검이 도화선이 되었듯이, 6월항쟁이 서울대 언어학과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가 도화선이 되었듯이, 제주도민은 더 이상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었다.

후임으로 박진경 중령이라는 문제아가 뒤를 잇는다. 그의 취임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박진경의 도민학살을 견디다 못해 그의 암살을 기획한 것은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였다. 그리고 그 거사에 동조한 양회천 이등상사, 신상우 하사, 강승규 하사, 배경용 하사, 이정우 하사(입산 미체포), 황주복 하사, 김종덕 하사의 이름도 같이 기억되어야 한다. 문상길 중위는 충청도 사람으로 육사 3기다. 제3중대장이었으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문상길의 나이 불과 22세였다. 총살형집행장이 낭독되고 마지막 유언의 기회가 주어진다.
"스물두 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막 바람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즉 민족분열, 국가분열, 문화분열의 위험성을 제주도민들은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그 귀결은 대결과 충돌, 즉 동족상잔의 전쟁밖에는 없다고 하는 비극적 결말을 예언하고 있었다. 이 비극을 예방하는 최선의 길은 외세로부터 온전한 해방이라는 것이다. "매국, 단선, 단정"이라는 테제는 오늘날 21세기 대한민국의 역사에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그리고 국민의 많은 사람들이 외세에 의존하여 분단된 상태로 사는 것을 근원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테제라고 생각치 않고 있다. 

제주도는 삼다의 섬, 여자가 많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것은 성염색체의 문제가 아니다. 남자들이 도저히 갇힌 제주섬의 핍박 속에서 견딜 수 없어 탈출하기 때문이다. 탈출한 제주도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가? 결국 조선대륙의 남부해안에 정착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을 "두무악"이라고 불렀는데 두무악이 많이 간 곳이 김해, 여수 등지였다. 여수는 물자가 풍부하고 비교적 개방적인 곳이었기 때문에 두무악들이 많이 근거지로 삼았다. 그런데 육지에 빌붙어 살기 어려운 사람들끼리 아예 배를 만들어 배에서 생활하는 제주난민들이 많았다. 이들은 배를 타고 떠돌며 해산물을 거두어들였고 무역을 했다. 이들은 관을 피해 바다를 떠돌며 생활을 했다.

이 책은 사상이 아니라 운동이다. 이 책은 역사서술이 아니라 우리 의식에 던지는 방할이다. 가치를 추구하는 자라면 이 책을 읽은 후 얻은 깨달음을 만세 만민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란"이라는 말을 붙이기 위해서는 성패와 무관하게 지향점의 구조가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권력자를 축출하려면 반드시 후임 권력자를 미리 결정해놓아야 한다. 김지회는 결코 이승만을 축출할 생각도 없었고, 자기가 이승만 자리에 앉을 꿈을 꾼 사람도 아니다. 그러려면 서울을 점령해야 하는데, 방송국을 점령하거나 해야 하는 데 그런 플랜이 없었다. 그들은 그냥 거부의 뒷감당이 버거워 지리산 속으로 피신했을 뿐이다. 피신하는 과정에서 진로를 막는 경찰들을 사살했을 뿐이다. 

여순민중항쟁은 14연대 사람들의 합리적 판단에 여순 지역 인민 전체가 호응한 결과의 산물일 뿐이다. 14연대 사람들은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모든 문제는 여수.순천 지역의 민중이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그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적 체제에 저항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1만 5천 명 이상의 학살로써 국가가 대응했다고 하는 것은 상식 이하의 만행이다. 11월 4일의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는 다음과 같다.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력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

여순민중항쟁으로 이승만은 강고한 우익체제를 구축했다. 예비검속, 연좌제를 실시했고, 보도연맹을 창설했다(30만 이상을 죽임). 군대로부터 완벽히 좌익세력을 청산하는 숙군사업을 완성했으며, 반민특위활동에 밀린 친일경찰까지도 대거 군대로 들어갔따. 향토연대의 특성은 해체되었으며, 여순민중항쟁으로 손실된 병력공백에 우익청년단체 사람들이 대거 입대하였다. 군대가 체제수호의 수단적 기구로 변모하여 부패하였다(박정희는 이러한 군대의 부패를 청산하는 정풍운동의 리도로서 결국 쿠데타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대학에는 학도호국단이 창설되었고, 주한미군철수가 6개월 정도 연기되었고, 국가보안법이 통과되었다. 경찰병력이 확대되면서 서북청년단원들을 대거 정규경찰화 시켰다. 그리고 국민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감시체계를 강화하는 유숙계제도를 만들었다. 이러한 모든 변화를 구축하는 계기가 바로 여순민중항쟁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민중항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공권력에 대한 공포감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불신감만 키웠다. 우리는 너무 몰랐다. 우리는 너무 조용했다.

 

느낀 점 :

한국사 중에 일제 강점기부터 근대사까지는 유독 불편하다. 한반도 역사에 그리 당당했던 시절이 많치 않음에도 이 기간은 유독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불편한 시기다. 개인적인 느낌에 이 시기는 너무 잔혹하다. 아마 개인의 가족사와 생각이 닿을만한 거리에 있어서 혹은 더 상상이 잘 되고 증거도 많아서 더욱 그리 느끼는 것 같다. 나는 나일 뿐, 내 뿌리는, 내 속에 피는 나와 상관없다라는 생각으로 과거에도 지금도 쭈욱 사는 나지만, 최근 베트남 관련 서적을 보다가 이들의 잔혹성은 일제 시대에서부터 여수, 제주, 광주에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때 여수와 제주에 벌어졌던 일에 대해 단순히 공산당 문제라고만 인식했지 정확한 사건의 내막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 제목 그대로 나는 내 뿌리와 관련된 이 사건들에 관해 완전히 몰랐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마주볼 자신이 없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 조금은 마주서서 알게 된 기분이다. 적어도 내가 다닐 때는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이승만의 행보, 신탁 통치의 정의와 관련된 사건, 여운형의 죽음 등 몰랐던 역사를 새로 배우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또한 이 일들을 직접 겪은 우리 할아버지 세대 분들을, 선거 때 항상 나와 반대 쪽에서 투표하시는 어르신들을 아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차피 현장을 모르니 글로 공감해봐야 새발에 피 정도일 것이다. 
요새야 광주민주화운동이지 어릴 땐 광주사태였고, 광주에서 자란 나는 이 일에 대해 교육을 통해 알고 있었는데 대학와서 보니 아무도 모르던 것이 정말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제주43 사건, 여순 반란 사건에 대해서도 단어부터 바뀌어야 할 것 같다. 또한 제대로된 규명이 필요할 것 같다. 책 속에 "이 책은 사상이 아니라 운동이다."라는 말이 있다. 슬프고 잔인하다하여 쳐다보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마주보고 정리해야 앞으로 나아감이 있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의 현재 모습에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많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광주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변화해감 같이 한발짝씩 모두가 관심을 갖고 나아가게 되길 바란다.

 

삶에 적용할 점 :

마주보기 힘든 진실도 힘내서 마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