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2
일시 : 2020.11.24
제목 : 오직 예수2
저자 : 라비 재커라이어스 외 지음
책 속 문구 :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벧전 3:15)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어느 집단이든 선동적인 강요의 제단 위에서 진정성 있는 대화를 희생시키는 극단주의자들을 주의해야 함을 배운다.
무신론 "신은 없다"
"죄가 남긴 최악의 결과는 내적인 것이기에, 그것은 가난과 고통과 신체적인 장애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주도권을 상실한 능력들, 무가치한 사랑, 초라한 이상, 그리고 동물화되고 노예화된 영혼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C.S.루이스는 이 오래된 문제에 대한 두려움이 악한 자가 우리 마음속에 어떠한 자기고발도 거부하도록 만든 가장 강력한 열심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죄란 "목적을 침해하는 것이요 불경함이 중독되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에서, 우리는 결정론을 거부한다. 그 대신 우리는 자신의 양심에게 사랑할 수 있는 자유라는 확증된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다는 진리를 말해 준다.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한 참된 기쁨들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과학주의 "과학은 신이 없음을 입증했다"
하지만 과학의 진보를 통해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배웠다고 해서, 어떻게(how) 배후에 누가(who) 존재하는지를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how)라는 질문(방법에 대한 질문)은 누가(who)라는 질문(주체에 대한 질문)에 답해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왜(why)라는 질문(목적에 대한 질문)에도 답해 주지 못한다.
사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철학자 중 하나인 피터 반 인와겐의 말에 동의한다. "과학의 어떤 발견도(지금까지 어찌되었든 간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최소한의 경향조차도 갖지 못했다."
나는 좀 더 나아가고 싶다. 과학이 신에 대한 믿음과 양립할 수 없지 않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과학이야말로 신의 존재를 강력하게 반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왜 이렇게 믿는지에 대한 네 가지 이유를 나누고 싶다.
1. 우주에는 시작이 있다.
2. 우주는 인식 가능하다.
3. 우주는 규칙적이다.
4. 우주는 생명체에 맞게 미세 조정되어 있다.
무신론적 진화만이 인간 발달의 유일한 결정 요인이라고 믿는다면, 당신의 믿음이 참된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이 생존에 유리한 믿음이라는 점을 믿을 이유밖에 없다.
무신론적 진화론이 인간 발달에 지침이 되는 유일한 원리라면, 도덕적 신념도 우리의 생존에 유익한 쪽이지 그 신념들이 참 진리라고 생각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마이클 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다. "도덕성은 단지 생존과 번식의 도구일 뿐이다. 그보다 깊은 의미를 찾는 것은 다 착각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생애가 시작된 것이 하나님께서 태초 이전에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에 안정감을 주시고 이생이 겪어야 하는 최악의 시간을 통과할 때도 우리를 지탱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목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거부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미세 조정하셔서, 수치와 범죄함이 없는 삶, 사랑과 희랑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로 충만하게 하실 것이다.
다원주의 "진리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이다"
나는 사랑받고 있는가? 미래는 어떨 것인가?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고 세속적 인본주의, 틀림없이 세계의 삼대 영향력 있는 세계관은 우리가 무엇을 가장 중시하는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슬람교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지할 수 없다는 사상을 갖고 있다. 만약 당신이 필수적인 이슬람의 다섯 기둥(신앙, 고백, 예배, 단식, 자선, 순례)을 지키는 데 실패하면, 누구도 당신을 구원해 줄 수 없다.
불교와 힌두교는 사성제를 추구하거나, 팔정도를 따르거나 좋은 업보를 얻으려면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다른 말로, 사람이 득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자신이 행한 바에 기초한다.
예수님은 이 점에서도 유일한 입장에 서 계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신다. "수고하고 무서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가령 종교가 지대한 악을 배출해 낼 때, 우리에게 오는 유혹은 그것을 바로 거부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지대한 악을 배출해 낼 수 있는 그 무엇은 또한 지대한 선을 배출해 낼 능력도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시되는 그것이 악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보다 오히려 그것이 강력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결국 그 힘을 선을 위해 사용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기독교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제시할 때, 겉포장에 집중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운데 있는 선물을 얻고자 한다면, 겉포장들은 중요하지 않다. 일부 크리스천들이나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박스를 들고서 부끄러운 행동을 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에 놓여 있는 선물은 크리스천들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진짜 핵심적인 선물은 나사렛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임을 당하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 일어나 승리하셨다는 주장이다.
인본주의 "우리는 신이 필요하지 않다"
상대주의 "당신에게는 진리이지만 나에게는 아니다"
아무리 상투적인 말을 시끄럽게 떠들어도, 인본주의는 그 핵심이 상대주의다. 모든 가치들은 개인의 환경이나 문화에 따라 상대적이 된다. 그리고 그 핵심에 있어서 상대주의는 자기 파괴적이다. 심지어 모든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말하기까지 하니 이것은 모순에 뛰어드는 격이다. 그 발언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기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제외하기도 한다. 자신을 포함하면, 인본주의가 항상 진리일 수는 없다는 주장이 된다. 자신을 제외하면, 절대성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자신은 절대성을 주장하는 격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진리가 상대적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을 분해시키는 용해제 안에 또 다시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
쾌락주의 "행복을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된다"
일상적인 날들의 모든 사소한 행위가 인격을 만들기도 하고 해체하기도 한다는 점을 망각했기 때문에 결국 사람이 은밀하게 침실에서 행한 것을 언젠가는 지붕 위에서 크게 외칠 날이 온다는 점도 망각했다.
진리를 '이해하라'가 아니라 '사랑하라'
이 이야기의 교훈은 부분적인 진리를 발견하고서 전체 진리를 발견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는 것이 마치 알아야 할 모든 것인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왜 성경은 우리에게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권면했는가? 20세기 신학자 피터 아벨라드가 말한 대로다. "의심함으로써 우리는 질문에 이르고, 질문함으로써 우리는 진리에 이른다."
여기에 첨언한다면, 우리가 진리에 이르는 것은 단지 질문함으로써가 아니라 공동체의 상황 속에서 진지하게 제기되고 온유와 존중으로 답변되는 질문을 통해서다.
두려움은 진리의 힘을 빼앗는다. 솔직히 우리는 매우 자주 진리를 알 때조차도 두려움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우리의 이성보다는 우리의 감정에 더 연관되어 있을 때가 많다.
진리가 인격이라면, 진리에 대한 탐구는 관계를 추구하는 의미로 충만해지게 된다. 모든 진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인격에 기초하기 때문에 모든 제기되는 질문은 인격에 대한 질문이고 모든 제시되는 답변은 인격으로부터 주어지는 답변이다.
느낀 점 :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 3:15)
종교는 그저 마음의 평안을 위안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 분으로부터, 물론 저의는 다른 것이었지만, 세 종교 이야기라는 책을 서점에서 서서 앞 몇 장을 보니 이슬람, 기독교, 유대교 뭐 다 같은 하나님 믿으면서 왜 그렇게 싸우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럴 때 어떤 답변을 해야 할지 알고 있는가? 내 경우 질문자의 다음 질문인 "너도 지하철에서 소리지르고 다니냐?"로 인해 의도가 궁금함이 아니었구나를 알아서 굳이 대답할 필요를 못느꼈다. 하지만 진정성 있게 물었던들 그 당시의 나로써는 명확하게 답을 하진 못했을 것 같다. 작가의 책들을 보며 그나마 좀 구분을 할 수 있게 되어 대략적인 설명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개인적인 생각에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먼저 다가가 진리를 권하지는 못할지언정 먼저 다가오는 사람에게 제대로 잘 설명을 못해줘서 진리를 알고 싶은 사람을 좌절하게 만드는 일은 없애고 싶다. 이런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 기독교 안의 진리에 대한 설명도 중요하지만,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불교, 유교, 힌두교, 이슬람교, 원불교, 유대교 등 이 많은 종교들 중에 왜 기독교이고 무엇이 다른 것인지 기독교인으로써 설명해 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저자의 전작인 오직 예수 1[Jesus Among Other Gods]에서 이런 내용들을 위주로 많이 다루고 있다. 그리고 지금 책인 오직 예수 2[Jesus Among Secular gods]에서는 세상의 무신론, 인본주의 등에 대해 설명하고 그들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며 기독교 진리를 설명한다. 영어 제목을 같이 적은 이유는 오직 예수라는 한글 제목도 결국에 답은 예수님 한 분이시다라는 의미에서는 참 좋지만 이 책의 내용을 잘 담아 내는 것으로는 영어 제목이 잘 담아 내는 것 같다.
무신론, 과학주의, 다원주의, 인본주의, 상대주의, 쾌락주의를 설명하고 이 사상들에 반론을 제기하며 기독교를 소개하고 있다. 공교육을 받다보면 어릴 때부터 그저 믿어온 사람이라고 해도 교회에서 말하는 것과 학교 교육 내용 속에서 괴리감을 갖기 쉽다. 또한 기존의 한국 교회는 그저 억압만 하는 분위기라 이런 의문을 말하고 같이 해결해 나가기는 쉽지 않으며 이로 인해 교회로 멀어지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 이 책과 같이 설명해주고 비교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내 경우에는 과학에 대해 깊이 모르고 그저 학교에서 나온 내용에 대해서만 접한 당시 진화론, 빅뱅 이론, 다중 우주론, 공룡의 존재 등은 거론하기 불편한 내용이었다. 나중에 조금 더 크고 나서 학교에서 언급하는 기본 소개보다 조금 더 알게 되고 나만의 결론을 갖게 되기까지 상당 기간 불편했었다. 읽고 나서 다행이었던 것은 나만의 결론이 저자와 비슷했다. 물론 저자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과학적이고 깊이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과학의 진보를 통해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배웠다고 해서, 어떻게(how) 배후에 누가(who) 존재하는지를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 말처럼 과학은 현재 우리의 세상을 분석하는 것이지 이것이 왜 생겼는 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자꾸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여 우연히 이루어 져서 현재 이런 현상이 벌어졌다는 느낌이다. 책에서 거론하고 있는 저자가 창조를 믿는 이유 4가지 중 하나는 미세 조정이다. 세상이 이렇게 구성되려면 모든 것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되는 데 그 확률이 책 속 표현으로 12번 연속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나올 확률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누군가 일부러 조정한 게 아니라면 자연 발생으로는 불가능한 것 아닐까?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없어 최대한 합리적인 추론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모든 것을 우연에 맡기는 쪽보다는 창조주가 의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추론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과학주의 외에 하나 더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상대주의 자체가 스스로 모순으로 무너지는 부분이었다.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가 없음으로 모든 종교나 주의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그들의 의견 또한 하나의 의견일 뿐인데 이것을 바탕으로 비 상대주의들을 배척하려고 하는 것이 결국 진리의 배타성을 인정하는 꼴이 아닌 가 싶다. 상대주의를 강조하며 법 제정까지 하려고 하는 데 상대주의에 따르면 상대주의도 진리가 될 수 없는 마당에 법 제정으로 누구를 강제하려는 지.
"두려움은 진리의 힘을 빼앗는다. 솔직히 우리는 매우 자주 진리를 알 때조차도 두려움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우리의 이성보다는 우리의 감정에 더 연관되어 있을 때가 많다."
진리는 넓은 화살 과녁 중 정중앙에 있는 단 한 점과 같다. 그 외에는 다 틀린 것이다. 진리 비스무리한 것은 진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나를 포함해서 이 세상엔 생각보다 진리에 관심 없는 사람이 참 많다. 또한 진리를 탐구하는 자라고 하면서 정작 진리를 만나면 외면하는 일이 많다. 그저 진리를 탐구하는 행위에만 집착하는 경우 일수도 있고, 찾아낸 진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혹은 나처럼 알아 낸다해도 그것이 아직 삶으로 반영되지 못하고 머리에만 남겨둔 채 익숙한 대로 지낼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발견하면 그 진리를 내 삶에 적용하겠다는 마음인 것 같다. 그게 없다면 진리를 탐구하는 행위는 삶에 의미가 없다.
만약 진리를 찾으면 전적으로 믿고 따를 것인가?
삶에 적용할 점 :
진리를 그저 머리 속에 두지 말고 삶에 적용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