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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잊은 그대에게

퐁~★ 2018. 11. 9. 13:20

일시 : 2018.11.09

제목 : 시를 잊은 그대에게

저자 : 정재찬

책 속 문구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말합니다. 의술, 법률, 사업, 기술, 이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인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라고. 듣기엔 꽤 멋진 말이었지만, 아등바등 살아도 모자란 판에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면서 잊고 지냈을 겁니다. 그땐 다들 청춘이었으니까요. 허나 한 세월 살다 보면, 제법 잘 살아왔다고 여겼던 오만도, 남들처럼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겸손도 문득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마는 그런 날이 오게 마련입니다. 채울 틈조차 없이 살았던 내 삶의 헛헛한 빈틈들이 마냥 단단한 줄만 알았던 내 삶의 성벽들을 간단히 무너트리는 그런 날, 그때가 되면 누구나 허우룩하게 묻곤 합니다. 사는 게 뭐 이러냐고. 그래요,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어차피 잊히지가 않는 법, 잊은 줄 알았다가도 잊혔다 믿었다가도, 그렁 그렁 고여 온 그리움들이 여민 가슴 틈새로 툭 터져 나오고, 그러면 그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여야 한다는 것을.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은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내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박노해, <다시>




무릇 신기한 것과 신비한 것은 다르다. 몸통이 잘리고 사람이 사라지는 마술은 신기하지만 신비하지는 않다. 그런다고 사람의 상처 하나 고친 적이, 마술은 없다. 반면에 자연, 우주, 생명 같은 것은 신비한 일이지 신기하다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한 경이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살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신기에 홀려 신비를 잊는다. 마치 마술에 홀려 현실을 잊는 것처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가짜 가치에 홀려 우리는 진짜를 잊고 산다. 말하자면 신비하지만 사소해서 그 가치를 몰라주는 일이 너무도 많은 게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내 안에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에서 벗어나려 한 것도,

끝내 아버지를 닮고 마는 것도

다 아버지의 그늘 탓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노라 하던 친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해도 결국 닮고 만 인생, 닮지 않는 데 성공했으나 그 역시 성공이 아닌 삶임을 인정하는 사람, 스스로는 성공이라 생각했지만 이번엔 그의 자식이 또 그렇게 살지는 않겠노라며 곁을 떠나간 경우 들은 또 얼마나 많던가.

그러나 아버지를 닮고 마는 것도 이 시의 제목처럼 아버지의 그늘 탓이지만, 아버지에서 벗어나려 한 것도 결국 아버지의 그늘 탓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그러려면 무엇보다 우리가 삶을 소풍처럼 살아야 한다. 소풍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다. 소풍은 노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런 실용적 목적도 없이 즐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행위가 아닌가? 세속적 욕망을 초월해야만 삶은 그 자체로 유희가 되고 즐거운 소풍이 된다. 모든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나야만 이승에서 행복한 소풍이 이루어지고, 그러한 삶은 천상의 삶과도 다를 바 없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논쟁이라고 해서 반드시 거기에 갈등만 있을 리는 없다. '너'로 인하여 '나'를 더욱 잘 알게 되고 '너'를 아는 것은 결국 '나'를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에게만 갇힐 때 우리는 아집에 빠지고, 그저 남의 겨 ㄴ해에 순응할 때 우리는 무지에 빠진다. 논쟁과 대화의 목적은 차이의 제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더 잘 들여다보고 그로부터 우리 자신과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데 있다. 요컨대 사이와 차이는 우리를 오히려 관용의 세계로 이글 것이다. 그리하여 사이와 차이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는 어둡던 눈이 떠지는 개안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시인들은 제각각 대상을 바라본다. 소재가 개성적인 시는 드물다. 같은 소재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각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개성적일 뿐이다. 같은 '눈'을 바라보지만 어느 시인은 눈의 하얀 색깔에 주목하기도 하고, 순수를 보기도 하며, 모든 걸 덮어 주는 점에 눈길을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눈 녹은 뒤의 질퍽함을 노래할 수도 있다.


느낀 점 :

시를 잊은 그대에게. 딱 나를 지칭하는 말이다. 정확히 잊었다기 보다는 모르쇠하고 지냈다. 처음 시를 접한 경로는 중학교 국어 시간이다. "파란 색 펜으로 밑줄" "밑에다 적어, 이 단어의 의미는" 등으로 구성된 국어 시간에 시를 본격적으로 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접한 내게 시는 단순히 암기의 대상이자 시험 점수를 얻기 위한 도구였다. 뭐 간혹 그래도 괜찮네 싶었던 시는 있었다. 그러나 시를 예술 작품처럼 인식하지는 않았다.


예술에 대한 내 인식은 삶에 기본은 아니지만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 예술 작품을 보고 좋다 아니다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요새는 그래도 작가가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라는 걸 아주 조금 생각은 해본다. 다만 답은 항상 못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내게 있어 생존이 우선이지 예술은 항상 그 다음이었다. 원시 시대의 예술도 하나의 생존을 위한 학습 도구라고 여겼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말합니다. 의술, 법률, 사업, 기술, 이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인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라고. 듣기엔 꽤 멋진 말이었지만, 아등바등 살아도 모자란 판에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면서 잊고 지냈을 겁니다. 그땐 다들 청춘이었으니까요. 허나 한 세월 살다 보면, 제법 잘 살아왔다고 여겼던 오만도, 남들처럼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겸손도 문득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마는 그런 날이 오게 마련입니다. 채울 틈조차 없이 살았던 내 삶의 헛헛한 빈틈들이 마냥 단단한 줄만 알았던 내 삶의 성벽들을 간단히 무너트리는 그런 날, 그때가 되면 누구나 허우룩하게 묻곤 합니다. 사는 게 뭐 이러냐고. 그래요,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어차피 잊히지가 않는 법, 잊은 줄 알았다가도 잊혔다 믿었다가도, 그렁 그렁 고여 온 그리움들이 여민 가슴 틈새로 툭 터져 나오고, 그러면 그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여야 한다는 것을"

책에서 나오는 이 말을 통해 예술과 생존의 우선 순위가 바뀔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됐다.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배고픈 인간이 되겠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말처럼, 생존을 위한 삶보다 예술을 위한 생존으로 생각을 바꿀 수도 있구나 싶었다. 간간히 음악회 가는 것 외에 연주회에 참여하던 과거에 비해 생존을 위해 한 걸음 양보했다고 생각했지만, 내 삶의 풍요는 당시에 비해 몇 걸음 후퇴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술에 대한 인식조차 생존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살던 내게 있어 예술이라고 생각되지 않던 시는 그저 긴 글보다 울림 있는 짧은 글의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어떤 시는 내 마음에 큰 울림을 주고 머리에 외우고 다니고 싶은 시가 있구나 정도였다. 이런 인식이기에 시를 읽고 예술 작품 감상하듯이 작가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고민해 본 적도 없고 그저 글에서 느껴지는 내 마음의 울림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나쁘다. 이게 끝이였다. 

"시인들은 제각각 대상을 바라본다. 소재가 개성적인 시는 드물다. 같은 소재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각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개성적일 뿐이다. 같은 '눈'을 바라보지만 어느 시인은 눈의 하얀 색깔에 주목하기도 하고, 순수를 보기도 하며, 모든 걸 덮어 주는 점에 눈길을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눈 녹은 뒤의 질퍽함을 노래할 수도 있다."

솔직히 책을 통해 시를 바라보는 인식이 예술로 바뀌지는 않았다. 다만 시에는 작가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나 소설에서도 작가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겠지하며 생각해보던 내가 시에도 있을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왜 이제야 깨달았나 싶다.


책을 읽는 동안 과거 교과서에서 보던 시들을 다시 보고, 또 못보던 시들을 다시 보며 단순히 답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닌 시를 오롯이 느껴보려고 노력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같은 시도 10대에 읽었을 때와 지금은 느낌이 많이 다르구나를 느꼈다. 또한 시 또한 단순 감동만을 주려는 짧은 글이 아닌 예술 작품처럼 작가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고 이를 통해 작가와 대화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삶에 적용할 점 :

새롭게 배운 시를 바라보는 관점을 적용해서 다른 시도 읽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