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수업
일시 : 2018.10.14
제목 : 라틴어 수업
저자 : 한동일
책 속 문구 :
여기에 맞선 사람이 15세기 이탈리아의 순수 인문학자이자 수사학자, 교육가인 라우렌티우스 발라(Laurentius Valla, 1407~1457)입니다. 그는 라틴어에 정통한 이탈리아의 저술가로 라틴어의 쇠퇴는 정확한 라틴어 지식의 결여에서 시작된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유럽 사회의 신.구교 간의 논쟁도 같은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다른 것을 생각하는 소통의 문제 때문이라고 여겼고요. 그는 언어를 올바로 사용하는 것이 소통과 문화 변용을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라틴어의 고상함에 대하여]라는 책을 씁니다.
언어 학습의 목적을 이야기하느 ㄴ것은 학습의 방향성이 다른 학문들에도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 즉 '어떤 것에 대해 아는 것' 그 자체가 학문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앎의 창으로 인간의 삶을 바라보며 좀 더 나은 관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 점이 바로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운다"라는 말에 부합하는 공부의 길이 될 겁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관찰하듯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관찰합니다. 다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못할 뿐이죠. 특히 자신의 단점에 대해서는 더 모르는 척합니다. 자신의 약점과 맞서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약점이나 단점과 직면했을 때 시선을 돌려 자신의 환경에 대해 불평해요. 특히 부모님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불평하는 것은 가장 하기 쉬운 선택입니다. 양심상 결코 마음이 편한 일은 아니지만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덜 아픈 일이죠. 그래서 우리는 항상 스스로에 대해 실망할 수밖에 없는 선택을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Postquam nave flumen transiit, navis relinquenda est in flumine.
포스트쾀 나베 플루멘 트란시이트, 나비스 렐린쿠엔다 에스트 인 플루미네.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강에 두고 가야 한다.
본래 장점이었던 것도 단점이 되어 짐이 되었다면 과감히 버려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어려움이 닥치고 나서야 한때의 장점이 거꾸로 저를 옭아매는 단점이 되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물론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입니다. 쉽게 알 수도 없지만 섣부르게 "이것은 내 장점이다, 단점이다"라고 규정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하고, 또 환경에 대한 태로들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어제의 메리툼이 오늘으 데펙투스가 되고, 오늘의 데펙투스가 내일의 메리툼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알 수가 없죠. 우리는 무엇 하나 명확히 답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스스로를 살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무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메리툼이고 데펙투스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성찰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곁가지를 뻗어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내 안의 땅을 단단히 다지고 뿌리를 잘 내리고 나면 가지가 있는 것은 언제든 자라기 마련입니다.
Summa cum laude
숨마 쿰 라우데
최우등
스스로의 발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남보다' 잘하는 것이 아닌 '전보다' 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럽 대학의 평가방식에서 시사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타인의 객관적인 평가가 나를 '숨마 쿰 라우데'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숨마 쿰 라우데'라는 존재감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 낮추지 않아도 세상은 여러 모로 우리를 위축되게 하고 보잘것없게 만드니까요. 그런 가운데 우리 자신마저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대한다면 어느 누가 나를 존중해주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스스로에, 또 무언가에 '숨마 쿰 라우데'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이 아기 천사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공부에 지치고 세상이 자신을 보잘것없게 만들어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더라도 언제나 자기 스스로를 위로하는 케루빔 천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남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으며 세상의 기준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다보면 초라해지기 쉬워요. 하지만 어떤 상황에 처하든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을 일으켜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에는 그런 사람이 한 번도 초라해져본 적 없는 사람보다 타인에게 더 공감하고 진심으로 그를 위로할 수 있는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냥 해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과 내가 할 일을 구분해야 해요. 그 둘 사이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또한 벗어났다고 해서 다시 빠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늘 들여다보고 구분 짓고 빠져나오는 연습을 해야 해요. 사실 학생들이나 어른들이나 잘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Non efficitur ut nunc studeat multum, sed postea ad effectum veniet.
논 에피치투르 우트 눈크 스투데아트 물툼, 세드 포스테아 아드 에펙툼 베니에트.
지금 많이 공부해서 결과가 안 나타나도, 언젠가는 나타난다.
우리는 바오로를 통해 어떤 공동체에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능했던 것이 또 다른 공동체에서는 그것을 얻기 위해 엄청난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이와 같은 현실에서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했는가 하는 훌륭한 본보기도 얻게 됩니다. 아마도 바오로는 인간이란 존재는 사고와 가치관의 노예가 될 수도 있기에 신학이 그 문제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도구가 되어주길 희망하지 않았을까요?
Do ut des
도 우트 데스
네가 주기 때문에 내가 준다.
'도 우트 데스'는 관용과 대화의 기본 원리로서 '상호주의' '상호성의 원리'로 작용했어요. 그 이후에도 이 말은 국제 관계와 조약에서 상대국이 우호적이면 우호적으로 대응하고, 비우호적이면 역시 비우호적으로 대응한다는 상호주의 원칙의 기반이 됐습니다.
살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 가운데는 외적인 요인도 많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이 뿌려놓은 태도의 씨앗들 때문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씨앗의 열매들 중 어떤 열매는 위에서 말한 '베아티투도'처럼 기쁨과 행복으로 돌아오겠지요. 하지만 어떤 열매는 고통과 괴로움이 되어 오기도 할 겁니다. 그때 우리는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저 이제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내가 뿌린 씨앗을 생각해보게 되겠지요. 그때 시간은 진정 모든 일의 가장 훌륭한 재판관이 될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태도를 지니고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겪는 모든 일에 대한 가장 훌륭한 재판관으로 어떤 시간을 맞이하고 싶은가요?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
포스트 코이툼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에스트.
모든 동물은 성교(결합) 후에 우울하다.
이 명문은 그리스 출신의 의사이자 철학자인 갈레노스 클라우디오스가 한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로마 시대 검투사의 외상 치료 전문의라고도 말합니다. 그가 말한 이 문장은 법의학뿐만 아니라 종교학에서도 사용되는데, 그 의미는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자기 능력 밖에 있는 더 큰 무엇을 놓치고 말았다는 허무함을 느낀다는 겁니다. 즉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개인적, 사회적인 자아가 실현되지 않으면, 인간은 고독하고 욍롭고 소외된 실존과 마주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외되고 고독한 인간, 특히 윤리적 인간이 비윤리적 사회에서 고통받고 방황하는 모습에서 인간은 영적인 동물로서 이성적 인간이자 종교적 인간을 지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학에서 이 명문을 해석한 내용입니다.
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인간은 타인을 통해 기억되는 존재입니다. 어머니는 관이 되어 제게 기억으로 남았고, 제 죽음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내일은 저 역시 관이 되어 누군가에게 기억으로 남을 것이고, 또 그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게 할 겁니다. 인간은 그렇게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죽음으로써 타인에게 기억이라는 것을 물려주는 존재입니다. 이제 거기에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봅니다. 부모님이 남긴 향기는 제 안에 여전히 살아 있지만 그 다음을 만들어가는 것은 제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기억을 밑거름 삼아 내 삶의 향기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가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제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가슴에 담고 오늘을 살아가고자 하는 저를 통해 신은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또한 그렇게 해서 제 삶은 어떤 기억으로, 어떤 향기로 남게 될까 하고요. 아마도 그것은 제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질문일 겁니다.
Si vis vitam, para mortem.
시 비스 비탐, 파라 모르템.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카르페 디엠, 쾀 미니뭄 크레둘라 포스테로.
오늘을 붙잡게. 내일이라는 말은 최소한만 믿고.
Tantum videmus quantum scimus.
탄툼 비데무스 콴툼 쉬무스.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
사람마다 자기 삶을 흔드는 모멘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힘은 다양한 데서 오는데 그게 한 권의 책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한 장의 그림일 수도 있고, 한곡의 음악일 수도 있습니다. 또 이렇게 잊지 못할 장소일 수도 있고요. 그 책을 보았기 때문에, 그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그 장소를 만났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눈뜨게 되고 한 시기를 지나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모멘텀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을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깨어 있고 바깥을 향해서도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책 한 권을 읽어도 가벼이 읽게 되지 않고 음악 한 곡을 들어도 흘려듣지 않게 될 겁니다. 누군가와의 만남도 스쳐지나가는 만남이 아니라 의미 있는 만남이 될 겁니다. 한순간 스치는 바람이나 어제와 오늘의 다른 꽃망울에도 우리는 인생을 뒤흔드는 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Verumtamen oportet me hodie et cras et sequenti die ambulare.
베룸타멘 오포르테트 메 호디에 에트 크라스 에트 세쿠엔티 디에 암불라레.
사실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이런 훈련은 나아가 인간관계에서 나의 태도, 나의 대화법 등 인생의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타인의 방법이 아니라 나의 방법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남다른 비결이나 왕도가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그렇기에 묵묵히 해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의 길을 잃지 않고 잘 가고 있습니까?
그 길을 걸으며 무엇을 생각합니까?
그 길 위에서 지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가요?
그리고 그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제 마음을 한 겹 한 겹 벗겨보니 그가 제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행동과 말을 통해서 제 안의 약함과 부족함을 확인했기 때문에 제가 아팠던 거예요. 다시 말해 저는 상처받은 게 아니라 제 안에 감추고 싶은 어떤 것이 타인에 의해 확인될 때마다 상처 받았다고 여겼던 것이죠. 그때부터 저는 상처를 달리 생각하게 됐습니다. 대부분 스스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주다가 자기 자신이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Dilige et fac quod vis.
딜리제 에트 팍 쿼드 비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너희가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 마태오복음 18장 18절의 말씀입니다. 이런 성경구절을 읽으며 '내 기억을 정화시키자'고 결심했습니다. 나쁜 기억이라면 좋은 기억으로 정화시키고 좋은 기억이 없다면 좋은 기억을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좋은 기억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결국 제 인생은 한 번뿐이니까 제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을 못해서 나쁜 기억을 품고 가기보다, 차라리 그냥 하고 싶은 것을 충실히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도 자기 생의 남은 시간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그렇게 또박또박 살아갈밖에요.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매일매일 충분히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남은 생 동안 간절하게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 두 가지를 하지 않고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Nolite ergo esse solliciti in crastinum crastinus enim dies solicitus erit sibi ipse sufficit dieei malitia sua.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제가 보기에 이 문장은 하루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인간의 임계치를 드러내주는 말 같아요. 인간은 하루에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감정의 한계치를 넘으면 겸허하게 그 감정을 내일로 넘겨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무엇 하나에 꽂히면 하루 종일 온통 그 생각뿐이고 잠도 잘 이루지 못해요. 하지만 우리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연기하듯이 매일매일 부정적인 마음도 늘 그 다음 날로 연기한다면 어떨까요? 절망, 지금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같은 것들을 내일로 미룬다면요?
Hoc quoque transibit!
혹 쿠오퀘 트란시비트!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기쁘고 행복한 그 순간에는 최대한 기뻐하고 행복을 누리되, 그것이 지나갈 때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 웃을 수 있는 순간을 위해 지금을 살면 됩니다. 힘든 순간에는 절망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분노를 잠시 내일로 미뤄두는 겁니다. 그 순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보는 것이죠.
Letum non ominia finit.
레툼 논 옴니아 피니트.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내지 않는다.
Dum vita est, spes est.
툼 비타 에스트, 스페스 에스트.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사람들마다 꽃피는 시기가 다르고, 저마다의 걸음걸이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장 노력에 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내가 언제 꽃피울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미리 알지 못합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저 그때가 찾아올 때까지, 돌에 정으로 글씨를 새기듯 매일의 일을 조금씩 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커피를 마시고 바닷가를 산책하며 살펴보니 새들이 참 많았습니다. 참새도 하늘을 날고, 비둘기도 하늘을 날고, 갈매기도 하늘을 날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새도 다른 새처럼 날지 못해 안타까워하거나 부러워하지 않고 모두들 자기의 방식대로 하늘을 날고 있더군요. 그렇습니다. 우리도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나와 다른 모습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조금씩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같다"
느낀 점 :
라틴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내게는 교양인을 넘어 멋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래서인지 라틴어를 좀 한다고 하면 허세를 부릴 수 있을 것 같고, 남에게 멋있어 보일 것 같고, 교양 넘치는 사람으로 보일 것 같은 환상이 있었다. 그래서 책 제목만으로 많이 끌렸다.
이 책을 읽고 많은 감동을 얻었고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정작 라틴어에 대한 관심은 사실 조금 시들었다. 동사 변형표를 보고 외국 사람들도 라틴어 공부를 통해 시련을 겪는다는 것을 보고는 지레 겁 먹었다. 영어도 잘 못하는 내게 라틴어는 무리겠구나 싶었다.
복잡한 문법의 라틴어보다 내게 더 다가온 것은 저자의 말들이었다. 내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고,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힘이 들기만 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진심어린 위로를 느낄 수 있었다. 기억해두고 싶은 많은 문구들 중에 이 책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세 가지만 추려봤다.
첫 째는 타인의 방법과 기준이 아닌 나만의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자존감을 높이는 여러 방법들을 책에서 보고 그 방법들을 적용해보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책을 쓴 저자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제의 장점이 오늘의 단점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공감을 했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끊임없이 나에 대해 생각해 보고 관찰해야 함을 느꼈다.
둘 째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연기하듯이 매일 생기는 부정적인 마음도 내일로 연기해보라는 것이다. 회사에서 화가 나고 짜증이 났을 때, 그 부정적인 마음을 제어하지 못해 욱하곤 했다. 비단 회사 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내 사람들에게 순간적인 부정적 감정들을 제어하지 못해 욱함으로 그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곤 했다. 이런 나이기에 부정적인 감정의 제어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동안 들었던 그 어떤 조언보다 가볍지만 또 쉽게 한번 도전해볼까 싶었던 말이었다. 욱한 나를 비난하거나 화를 못내서 호구가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걱정보다 그냥 내일 화내자. 내일 욱하자라고 생각하면 더 쉽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 부분은 내게 맞는 방법인지 일단 다음에 시도해 보려 한다.
마지막으로 타인의 모진 말에 상처를 받는 것은 내 안의 약함과 부족함을 확인했기에 내가 상처 받은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타인의 말에 내가 상처를 받을 때 항상 타인이 이해심, 배려, 인간에 대한 이해 능력 등이 부족해서 일어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점도 그저 남이기에 하고 슬쩍 넘겨버릴 수도 있는 부분에서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기도 했다. 엄밀하게 생각해보면 내 안의 숨어 있는 자격지심이 발동한 것 같다. 내 옹졸함, 내 부족함이 들켜버려 지나가는 말에도 난 상처를 입었구나 싶었다. 결국은 나를 더 알아 내야 세상을 더 둥글게 살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나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가 되고자, 더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되고자 끊임없이 현재의 나에 대해 묻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남과 비교함으로 내게 더 상처주는 행위는 자제하며 그저 내 속도로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내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삶에 적용할 점 :
나에 대해 더 생각해보자. 그리고 내 속도로 살자. 남과 비교하지 말고 단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