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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퐁~★ 2020. 12. 14. 08:39

일시 : 2020.12.12

제목 : 나를 따르라

저자 : 본 회퍼

책 속 문구 :

성서는 예수 따르기에 관해 말하는데, 이는 인간의 모든 교의로부터, 곧 부담을 주고 억압하고 걱정과 극심한 양심의 가책을 주는 모든 것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예수를 따르는 가운데 자기 율법의 딱딱한 멍에를 벗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멍에를 지게 된다. 이것은 예수의 진지한 계명들을 손상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기는커녕 예수의 온전한 계명인 무조건 따르라는 부르심이 계속되는 곳이라야 인간 해방이 온전히 이루어져 예수와의 친교가 가능해진다.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은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어디로 인도하는가? 그 부르심은 어떤 결단과 분리를 요구하는가? 우리는 이 물음을 품고, 홀로 답을 알고 계시는 분께 나아가야 한다.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아신다.

은혜가 무엇보다도 값비싼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소중하기 때문이고, 이를 위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목숨을 대가로 지급하셨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르심에 복종하는 것 이외에 믿음에 이르는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는다.

그대가 믿는지 믿지 않는지를 따지는 것은 그대에게 맡겨진 일이 아니다. 그대가 명령을 받은 것은 복종의 행위이니, 즉각 실행에 옮겨라. 믿음을 가능하게 하고 실제로 존재하게 하는 상황은 그 행위 속에서만 주어진다.

매 순간, 모든 상황에서 행동과 복종을 요구받는 자는 나다.

복종이 무엇인지는 복종하면서 배우는 것이지 질문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다. 먼저 복종해야 진리를 알 수 있다.

자기 부인은 더는 자기 자신을 알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아는 것이며, 이제는 걷기 어려운 길을 바라보지 않고 앞서 걸으시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기 부인은 오로지 다음의 사실만을 의미한다. "그분께서 앞서 가시니, 그분을 꼭 붙잡아라."

예수께서는 악인을 악하다고 하신다. 나를 폭행하며 괴롭히는 자를 용서하고 정당화하는 것이 나의 행동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마치 내가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악인의 권리를 이해해 줄 용의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이런 감상적 고려와 아무 관련이 없다. 수치스러운 구타, 폭행, 착취는 언제나 악하다. 제자는 이 점을 알아야 하고,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그것을 증언해야 한다. 다른 식으로는 악인에게 타격을 줄 수도, 악인을 극복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제자에게 맞서는 악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악이기 때문에, 제자는 악에 맞서기보다는 악을 견디면서 끝장내고, 그래서 악인을 극복해야 한다. 자발적 고난은 악보다 강하다. 그것은 악의 죽음이다.

약함을 타고난 사랑이 아니라 힘을 타고난 사랑, 두려움에서 비롯된 사랑이 아니라 진리에서 비롯된 사랑이 어찌 타자를 미워하겠는가?

 

구체적인 복종 속에서만 인간은 실제로 믿음에 이른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단순한 복종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곳에서는 자기 정당화라는 값싼 은혜가 예수의 부르심이라는 값비싼 은혜를 계속해서 밀어낸다.

우리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제자는 예수 따르기의 가시적인 일을 누구에게 감추어야 하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감추어서는 안 된다. 예수의 제자는 자기의 빛이 반짝이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되, 가시적인 일을 하는 자신에게는 감추어야 한다.
우리가 던지는 두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예수 따르기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의 내용인 가시적인 것과 은밀한 것의 통일은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도대체 어떻게 동일한 것이 눈에 띔과 동시에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는가? 이는 마태복음 5장에 등장하는 내용을 떠올리기만 해도 답할 수 있는 물음들이다. 비범함, 곧 가시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그 아래 있는 것이 제자들이다. 당연하고 은밀하면서 동시에 가시적이고 비범한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다.
우리가 던지는 세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5장과 6장의 모순은 어떻게 해결되는가? 따르기라는 개념 자체가 그 모순을 해결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선행을 알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대의 선행이 될 뿐 그리스도의 선행이 되지 못한다.

"너의 기도를 통해 어떻게든 너 자신을 관철하려고 하는 너의 의지가 죽어야 한다."

걱정은 항상 내일에 초점을 맞추지만, 재물의 용도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을 위한 것이다 내일을 보장하려는 마음이 오늘의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 내일 일을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오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고스란히 받는 사람만이 걱정 없이 사는 자다. 일용할 것들을 그날그날 받을 때만 내일 일에 대한 걱정에서 놓여날 수 있다. 내일 일을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끝없는 걱정에 내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이 말씀을 처세술이나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기를 알아보고 따르는 이들에게 자기 아버지의 사랑을 약속하시고,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를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자를 걱정 없이 살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지 걱정이 아니다. 이제 제자는 다음 사실을 깨닫는다. 걱정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내일과 나중은 우리에게서 완전히 제거되었다. 걱정이 우리 몫이라는 듯이 처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세상의 상황을 조금도 바꿀 수 없다. 세상을 통치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므로, 걱정은 오로지 하나님 몫이다. 걱정은 우리 몫이 아니며, 우리는 완전히 무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걱정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걱정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우리 것으로 가로채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서 그분을 내 삶의 주인과 구원자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나에게 건네시는 그분의 분명한 말씀을 알아야 한다.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자다. 하나님은 세상이 다스려지기를 바라셨고, 그리스도가 섬김 속에서 승리하기를 바라셨으며, 그와 함께 그리스도인들도 승리하기를 바라셨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세상과는 다른 "형상"을 취한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점점 더 이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 형상은 이 세상에 오셔서, 무한한 자비로 인간들을 품으시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추방당하신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하지만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은 세례와 칭의라는 일회적 선물을 받고 이것을 날마다 기억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삶의 유지라는 선물을 최후 심판의 날까지 보증받는다. 이 삶의 유지를 일컬어 성화라고 부른다.

 

느낀 점 :

'선한 능력으로'라는 찬양을 부를 때마다 이 찬양이 본회퍼 목사가 나치에게 사형 당하기 전에 가족에게 보내는 시라는 말이 생각나며 왠지 모를 감동이 더 느껴진다. 이래서 아날리제 같은 것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여차저차하여 본회퍼 목사님에 대한 관심이 있던 차에 책을 읽을 기회가 주어져서 덥썩 읽기 시작했다.

'나를 따르라'에 대한 책 제목처럼 이 책에서는 부르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말씀 중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를 따르라 등의 강권하심을 들으면 그 시대와 지금은 다르니까라는 등의 교활한 생각을 하며 외면하곤 한다. 당연하지만 실 생활에 있어서는 잘 적용이 안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당시 강권하는 말씀을 들으며 그동안의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책 속에 세 가지 특히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하나는 행동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예수의 부르심에 복종하는 것 이외에 믿음에 이르는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는다."
흔히들 믿음만을 강조한다. 그저 복종하고 행동하다보면 믿음이 생긴다는 반대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맥락의 유명한 말이 있다. 웃다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이다. 기분이 좋아서 웃기도 하지만 그저 웃다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져야 된다는 점과 믿음이 없더라도 행동하다 보면 믿음이 생긴다는 것을 강조했다. 믿음이 확신이 되지 못한다며 고민하던 터에 이 말은 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했다. 나는 부르심에 순종했는가? 웃기지도 않은 자기합리화를 늘어놓는 것이 아닌 그저 순종했는가? 반성하게 된다.

"하지만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은 세례와 칭의라는 일회적 선물을 받고 이것을 날마다 기억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삶의 유지라는 선물을 최후 심판의 날까지 보증받는다. 이 삶의 유지를 일컬어 성화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사는 삶의 유지를 성화라고 표현한 점이다. 최후 심판의 날까지 인간의 능력으로는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된다는 말만 들으면 나 같은 게으른 사람은 그럼 죽기 전에 한번만 회개할래요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보기 전에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영적 침체라는 책을 보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함을 깨닫기도 했고 천로역정의 비유를 든 엄마의 설명에 깨닫기도 했었지만, 성화라는 단어로 설명은 처음 들었고 이 단어가 이 과정을 설명하는 데 현재까지 제일 잘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걱정이 우리 몫이라는 듯이 처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세상의 상황을 조금도 바꿀 수 없다. 세상을 통치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므로, 걱정은 오로지 하나님 몫이다. 걱저은 우리 몫이 아니며, 우리는 완전히 무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걱정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걱정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우리 것으로 가로채는 것이 될 것이다."
끝으로 걱정은 우리 몫이 아니라고 한다. 근심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강도 높게 말하는 것은 처음 들었다. 근심 걱정은 우리 몫이 아니고 하나님 몫인데 우리가 근심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우리의 것으로 가로채는 것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강도 높은 근심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도 내면 어딘 가에 나도 모르게 또 근심 걱정이 떠오르고 곧 내 머리를 지배하는 이 과정이 반복될 것을 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이 문장을 생각하면 더 쉽게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또 다른 본회퍼 목사의 책인 [옥중 서신 -저항과 복종]을 보면 이 책에 대한 글이 나온다. "나는 성스러운 생활과 같은 무언가를 하려고 시도하면서 믿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네. 나는 그 길의 종점으로서 '나를 따르라'를 쓴 것 같네. 나는 오늘날 그 책이 얼마나 위험한 책인지 분명히 알고 있지만, 전과 마찬가지로 그 책의 입장을 지지할 것이네."
이 책에서도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대답을 행동으로 강조하고 있다. 말씀에 복종하고, 사회 속에 삶으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을 강조하고 있다.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였던 본회퍼 목사의 삶을 보면 이 말을 더 뜨겁게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복음에 대해 생각만 하고 삶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많은 부분에 찔리고 부담을 느끼면서 읽었다. 찔리고 부담스러웠던 만큼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써 부족했던 것 아닌가 싶다.

 

삶에 적용할 점 :

행동하자. 생각만 하고 공부만 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